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안식월 제주한달살기 31

[제주안식29-마지막] 신비가 널렸다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제주한달살이 마지막 날인 것을 이렇게 몸이 티를 낸다. 내 마음보다 내 몸이 더 제주를 떠나는 것을 서운해하는가 보다. 하긴, 내 몸이 오랜만에 몸다워졌다. 매일 평균 10km 걸었다. 올레길, 오름길, 바닷길, 곶자왈, 숲길, 시골밭길, 돌담길, 섬 둘레길, 오솔길, 한라산 등산로.... 내 다리가 아주 신이 났다. 눈도 얼마나 좋았을까. 매일 바다를 본다. 매일 한라산을 본다. 그러니 눈이 잠시라도 더 제주에 머물고자 일찍 뜨지 않았던가. 몸은 정직하다. 안식월엔 몸이 더 많이 움직였는데, 각 마디와 근육을 왕성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 몸의 안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29일간 내 몸은 진정한 안식을 누렸다. 밤새 비가 왔다. 3층 복층이라 그런지 ..

[제주안식28]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벌써 마지막 밤이다. 오늘 자고 내일 일어나면 아침 일찍 공항으로 출발한다. 집에 갈 시간이다. 창밖으로 제주 바다가 보인다. 오랫동안 이 장면은 하나의 그림이 돼서 내 마음 미술관에 오래 걸릴 것이다. 한라산 등반 여파가 있다. 밤 잠을 설쳤다. 그 어느 때보다 일찍 일어났다. 미지근한 물 한 컵 마신다. 보이차를 내린다. 큐티를 한다. 블로그에 올린다. 그래놀라를 우유에 타서 먹는다. 씻는다. 독서를 한다. 오늘은 주일이라 교회에 가야 한다. 어제 공항에서 렌트를 했기 때문에 오늘은 걷지 않는다. 다리에 알이 배겨 걷지 못한다. 걸어서 1시간 10여분 가는 시골길을 차로 10분 만에 간다. 조수교회 주차장부터 예배당 입구까지 한 대여섯 분이 인사를 하신다. 입구에 그 권사님이 계신다. "아직 안가셨군..

[제주안식27-2] 한라산 등반

내 몸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인식되고 있다. 종아리가 아프다. 알이 살짝 배긴 것 같다. 허벅지도 뻐근하다. 이유가 뭘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되지 않는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서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어디를 다녀온 것인가? 사진이 합성된 것일까?  5시 20분 잠에서 깬다. 사실 제대로 잠에 들지도 않았으니 깼다고 하기도 그렇다. 여하튼 대충 씻고 짐을 꾸린다. 생수 3개, 우비, 간식, 스틱, 이거면 되는 건가?6시 출발한다. 차의 창문을 열고 사진을 찍는다. 바로 저기, 저 멀리 있는 저 산, 저 봉우리, 매일 보던 바로 그 한라산에 오늘 오를 예정이다. 과연 오늘 하루가 지나갈 것인가? 나는 해낼 수 있을까? 7시 관음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매점에서 김밥과 국수로 아침 배를 채운다...

[제주안식27-1] 일몰의 아름다움

제주 생활 27일째다. 내가 얻은 숙소는 서향이다. 제주 서쪽 바다로 해가 떨어지는 장면을 숙소 창으로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한 번도 해가 바다 뒤로 넘어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서너 번 정도 비슷한 장면을 봤다. 해가 바다를 향해 서서히 내려앉았는데 아쉽게도 구름인지 먼지인지가 바다보다 먼저 해를 삼켜 버렸다. 나름 멋있었다. 그러나 아쉬웠다.  오늘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종훈 형제, 동조 형제를 배웅하고 차를 렌트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운전하니 좋았다. 일부러 서북쪽 해안도로로 들어가다 무심코 하늘을 봤다. 맑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태양이 엄청난 빛을 발산하며 바다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계속 바라보며 해안도로를 달린다. 협재해수욕장에 잠시 차를 주차하고 ..

[제주안식26] 차귀도 일몰과 돌고래

두 형제가 제주에 내려왔다. 종훈 형제는 청년부 시절부터 친구였고, 동조 형제는 내가 기윤실 간사할 때 대학생위원회에서 만난 사람이다. 오래전 알았으나 그 이후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최근 우리 교회에 합류했다. 든든하고 편안한 사람들이다. 지난해에 캄보디다에 함께 다녀왔고 올해도 두 번째 캄보디아 단기선교에 다녀왔다. 그 두 형제가 제주에 내려왔다. 한라산에 오르기 위해서다.  오후 해질녘에 내 숙소로 왔다. 날씨가 너무 좋다. 왠지 일몰이 멋있을 것 같다. 짐을 내려놓지 마자 서둘러 싱게물해변으로 나간다.  두 사람 뒤로 멀리 한라산이 또렷하게 보인다. 바로 그 산에 우리 세 사람이 오를 예정이다. 해 질 녘 싱게물 공원에 처음 나와 봤는데 참 아름답다. 아직도 내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

[제주안식25] 제주 카페 순례

카페가 쉼과 재활의 공간이라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된 것은 2000년 때부터다. 아내가 보라매공원 안에 있는 남부장애인종합복지관, 음악치료사로 취업했다. 내가 기윤길 간사를 할 때인지 그만두었을 때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공원 동쪽 롯데타워 인근에서 아내를 기다렸다. 서점은 기다리기 좋은 장소였고, 사우나도 나름 괜찮았다. 우연찮게 '할리스'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커피란 자고로 달달해야 하는데, 자판기 커피 또는 맥심만 마시던 내게 할리스 아메리카노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아메리카노를 마셨던 것 같다. 아내를 기다릴 때 할리스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책을 볼 수 있으니 기다린다는 사실을 종종 잊기도 했다.  그 이후로 여러 프랜차이즈 ..

[제주안식24] 사랑 받는 자

집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졌다. 가족들이야 보고 싶지만 아쉬움과 불안감이 교차한다. 무얼 먹을까 무얼 마실까 무얼 입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더 못해서 아쉽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걱정이다. 그래봤자 소용없다. 시간을 지날 것이고, 나는 다시 일상에서 늘 하던 대로 하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의 나는 안식 이전의 나와 같은 나일 것이다. 좀 더 나아진 나일까. 비양도에 들어간다. 예매할 것도 없다. 점심시간에 맞춰 무작정 갔더니, 마침 낮시간 배가 증설됐단다. 10분 후에 배가 출발하니 가서 승선 준비하란다. 앗사라비오~. 숙소에서 해지는 쪽 반대로 고개를 돌리면 동그란 섬이 하나 보인다. 비양도다. 처음엔 무인도인줄 알았다. 언듯 보면 그냥 하나의 오름 같이 보인다. 그러나 ..

[제주안식23] 환대

글을 쓰려고 앉았다. 첫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한다. 무슨 글을 써야 할지 아직도 명료하지 않다. 그럼에도 글을 쓰기 시작한다. 괜찮다. 예전엔 사유로 글을 썼다면, 이젠 손가락으로 사유한다. 내 머릿속엔 모든 재료가 있다. 내 몸이 기억한다. 그것을 분류하고 배열하여 재종합하는 것은 사유가 하는 게 아니다. 손가락이 한다. 노트북을 켜고 하얀 페이지를 펼쳐놓는다. 자판 위에 손가락을 얹는다. 손가락의 움직임을 머리가 따라가 본다. 복잡하게 부유하던 개념과 이미지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손가락이 사유를 시작했다. 손가락이 의미를 창출하기 위해 두뇌에 자극을 주었다. 손가락을 믿는다. 열 개의 손가락이 서로 신비하게 조합하여 움직이는 것에 내 존재를 맡긴다. 손가락에서 손가락으로 사유의 전기가 들어..

[제주안식 22] 나는 아빠다

친구들이 돌아가고 다시 한주의 첫날을 맞았다. 지난번 아내가 돌아갔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여파가 있다. 날씨도 흐리고 몸의 상태도 썩 좋지 않다. 어디 가고 싶은 데도 없다. 종일 숙소에서 읽다 소파에 누어 졸기를 반복한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닷바람이 차다. 또다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스무 살 대학 1학년 시절이 떠오른다. 그 나이는 불안이라는 나이였다. 그냥 하루를 사는 그 자체가 불안이었다. 하루를 잘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무의미를 숙고했다.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오네시모라는 종은 원래 '무익한'이란 뜻이었는데, 그가 바울을 통해 예수를 만나고 유익한 사람이 되었단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때 만난 복음송가가 있다. 내가 아는 국내 복음송가 중에 가장 좋은 가사였다. 빛이 ..

[제주안식 21] 그 사람을 가졌는가

2017년 여름이었다. 병원심방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환우를 위해 기도할 때면 늘 시편 23편을 먼저 외우며 기도하곤 했다. 시편 23편이 환우들에게 큰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편을 수백 번도 더 암송했기 때문에 ‘여호와는~’ 하고 시작하면 막힘 없이 끝까지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2절을 암송하고 3절로 넘어가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된 것이다. 그날 저녁부터 불안증세가 시작됐다. 다음날 아침 일어났는데 여전히 불안감이 엄습했다. 교회를 가면 좀 나아지려니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런 증세가 수요일까지 계속됐다. 다음날에도 사라지지 않으면 병원에 가려 했다. 감사하게도 수요일 밤 음악치료사인 아내가 눈물로 기도해 주고 사랑으로 찬양해 주자 그날 밤부터 평온을 되찾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