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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24] 사랑 받는 자

신의피리 2024. 4. 24. 20:01

집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졌다. 가족들이야 보고 싶지만 아쉬움과 불안감이 교차한다. 무얼 먹을까 무얼 마실까 무얼 입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더 못해서 아쉽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걱정이다. 그래봤자 소용없다. 시간을 지날 것이고, 나는 다시 일상에서 늘 하던 대로 하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의 나는 안식 이전의 나와 같은 나일 것이다. 좀 더 나아진 나일까.

 

비양도에 들어간다. 예매할 것도 없다. 점심시간에 맞춰 무작정 갔더니, 마침 낮시간 배가 증설됐단다. 10분 후에 배가 출발하니 가서 승선 준비하란다. 앗사라비오~.

비양도 들어가는 배

 

숙소에서 해지는 쪽 반대로 고개를 돌리면 동그란 섬이 하나 보인다. 비양도다. 처음엔 무인도인줄 알았다. 언듯 보면 그냥 하나의 오름 같이 보인다. 그러나 200여명이 살고 있다. 

판포포구에서 바라본 비양도

 

한림항에서 비로 15분이면 비양도에 들어간다. 점심식사 시간인데 어쩌나 걱정하며 검색해보니 비양도에도 식당이 있다. 하선하자 마자 곧장 제일 가까이에 있는 '호돌이식당'에 들어간다. 한 10여 명의 탐방객들도 같이 들어간다. 기대가 없었다. 그냥 맨 위에 있는 시그니처 같은 '호돌이 덮밥'을 주문한다. 

호돌이 덮밥

 

아무 기대도 안 했고, 메뉴 검색도 안 했다. 처음으로 점심식사를 기대 없이, 아무 식당에서 먹었다. 그런데 너무 맛있게 먹었다. 한 손님이 계산하면서 말한다. '내가 제주에서 먹은 것 중에 오늘이 제일이다!' 아내가 무척 좋아할 메뉴다. 옆테이블에서 먹는 물회도 무척 맛있어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혼자 왔다. 메뉴 하나만 시킨다. 멋있는 풍광을 볼 때 그 아름다움을 아내와 함께 공유하지 못해 슬픔이 느꼈는데, 맛있는 음식을 눈 앞에 두고 또 비슷한 감정이 생긴다. 

 

식사를 마치고 비양도 정상으로 올라간다. 실은 비양도에 대해서도 별로 기대가 없다. 그냥 걸어야 하니 나왔고, 새로운 곳에 가고 싶으니 가까운 한림항으로 왔다. 가파도나 차귀도만 하더라도 무척 기대가 되었으나 비양도는 하나도 기대가 되지 않는다. 탐방객도 그리 많지 않다. 호젓하게 걷는다. 해발 120여 미터 되는 정상으로 올라간다. 

비양도 정상

 

비양도에게 미안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올라가는 길이 너무 좋았다. 비양도 둘레길도 너무 좋았다. 차귀도처럼 태고의 신비를 가진 멋은 없다. 가파도처럼 청보리라는 매력적인 소품들도 없다. 그냥 평범한 오름처럼 생겼다. 정상은 분화구이지만 나무들로 빽빽하다. 다소 심심하고 밋밋하지만, 비양도에게 호감이 갔다. 그 자체로 멋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 실은 차귀도나 가파도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더 아름답고, 더 멋지다 할 사안이 아니지 않은가. 다들 오래전 화산이 폭발하는 과정에서 저마다 자연스럽게 섬이 형성되었을 뿐이다. 노력해서 아름다움을 가꾼 것이 아니다. 노력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은 것도 아니다. 생긴 모양 그대로, 비양도는 아름답다. 차귀도에 비교해서, 가파도에 비교해서, 비양도가 별로 매력 없다 생각했던 내게 여전히 비교의식이 오랜 질병처럼 들러붙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의 확 띄는 매력적인 사람들이 있다. 눈이 크고 예쁘게 생겼거나, 조각 같은 외모를 가진 이들도 있다. 여러 번 봐도 잘 기억나지 않는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능력에, 평범한 성격을 가진 이들도 있다. 그러나 평범하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사람은 고유하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받는 이'다. 재능의 크기가 작고, 능력의 크기가 작을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만큼은 변함없다. 그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며, 수시로 기억하는 것이 은총이다. 나도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평범하다. 지극히 평범한 외모다. 지극히 평범한 수준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받는 자다. 누군가가 비교한다고 해서 더 우쭐해지거나 더 비굴해질 필요가 없다. 내가 하나님 앞에 그러한 존재이듯이,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비교하지 말라. 감히 비양도를 비교하지 말라. 그냥 비양도는 비양도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에서 어디가 가장 좋았는가 누가 묻는다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각자 모든 곳이 다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한림항으로 돌아왔다. 한림항에서 협재해수욕장까지 제주올레길 14코스 일부를 1시간여 걷는다. 1시 방향으로 보이던 비양도가 4시 방향으로 바뀔 때까지 걸었다.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는 오늘 비양도에게서 사랑받는다는 것을 배운다. 오늘 비양도도 나한테서 엄청 사랑받고 있다. 알아주길 바란다. 알고는 있을까? 누군가가 나를 엄청 존귀하게 여기고 있을까? 나는 그것을 알아챌 수 있을까?

협재해수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