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세미한 소리를 듣다 42

내가 걷기를 사랑하는 이유

방금 걷고 왔다. 걷기 전에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걷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점심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율동공원 쪽으로 걷는다. 한바퀴를 걷고 돌아오면 5km는 족히 될 것이다. 습관을 따라 걷던 도중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다. 지난 9년 간 지나다니던 길이었는데 낡은 아파트 담벼락 옆에 숲을 향한 작은 오솔길이 눈에 보인다.  뭐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나는 본능적으로 숲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대강 길을 예상하면서 4월 초 잿빛으로 가득한 숲을 걷는다. 홀로 숲을 걸을 때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는 걷기를 사랑한다. 아무 방해 없이 오로지 사유에 골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유의 흐름은 중구난방이다.  이 생각 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가히 ..

나에게 산책은 구원이다

나에게 산책은 구원이다. 산책은 쇠퇴해가는 나의 심장과 폐를 활성화한다. 산책은 나의 허리를 뱃살로부터 구원한다. 산택은 나의 안구를 노트북과 휴대폰 스크린으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마음을 스트레스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심신을 쇠락으로부터 구원한다. 동물원의 사자가 우리 안을 빙빙 도는 것은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워서라는데, 산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 김영민. p.285. 산책 散策 '구원'이란 단어의 용도가 조금 잘못 된 듯하나, 나는 수긍한다. 나도 매일 필사적으로 걷는다. 이 허무한 인생에서 산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살아 있음을 가장 절절히 느끼는 시간은 걸을 때다.

현승이의 입대

현승이가 군대에 갔다. 지난 9/2(월) 강원도 화천에 있는 15사단 신병훈련소에 들어갔다. 아들 둔 부모들에겐 누구나 겪는 일종의 통과의례이건만, 그래도 아들 입대하고 나니, 내내 마음이 짠하다. 아들을 연병장에 내려놓고 나오는 길, 뒷모습을 보니 목이 멘다. 아내는 아들 내려놓은 지 1분도 안돼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나는 1993년 1월 5일에 강원도 고성으로 입대했다. 벌써 30년도 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신병 시절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래서 아들이 지금 무얼 하고 있을지가 눈에 그려진다. 낯선 환경, 긴장되는 분위기, 완전히 다른 명령 하달 식의 군 문화,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한다. 집에서 입던 옷을 벗고, 군에서 준 단체복으로 갈아입는다. 정해진 시간에 일찍 일어나고 일찍 ..

The Naked Now, 벌거벗은 지금

휴가 대신에 피정이라는 말을 쓴다. 편히 쉬고 푹 자고 재밌게 논다는 의미로 치면 휴가가 맞다. 그러나 홀로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하고 묵상한다면 피정이란 단어가 적절하다. 휴가와 피정 사이에서 늘 애매한 쉼을 갖다, 제대로 피정다운 피정을 체험하는 중이다. 왜관베네딕도수도원 손님의집에 2박3일간 머물고 있다. 둘째날 밤이다. 새벽 5:20 아침기도를 시작으로 6:30 기도, 11:45 낮기도, 18:00 저녁기도, 20:00 끝기도까지, 하루 5번의 기도에 참석한다. 시편과 말씀으로 구성된 기도시간이 신선하다. 멜로디를 따라 부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한 일이다. 실은 내 마음은 둘로 쪼개져 있었다. 수도원 체험도 체험이지만, 시니어매일성경에 기고할 첫번째 원고를 쓰는 게 ..

중년기의 끝자락에서

중년(中年)이라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거의 끝자락에 다다른 듯하다. 사춘기(思春期)도 시작과 끝이 있듯이, 중년기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얼른 끝내고 축하파티라도 하고 싶지만, 순리대로 가야 한다. 매일을 살아내고, 순간을 정직하게 마주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중년기가 끝날 것이다. 그럼 조금 더 성숙해질까? 조금 더 여유로워질까? 내 중년은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됐다. 내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16년을 다녔던 교회를 떠났다. 내 청년기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나는 그 교회에서 만났다. 첫 직장인 기윤실에서 간사가 되었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가 되었다. 그리고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두 자녀를 낳았으며, 공동체를 체험했다. 뜨거운 시기였다. 열정이 뿜어져 나오던 그 시기에, 나는 죽음을 간..

장미꽃을 좋아하는 어머니

어머니 사진첩을 보면 꽃밭에서 찍은 사진이 많다. 죄다 아버지께서 찍어 주신 사진이다. 얼마 전 형과 같이 양평 분원리로 드라이브를 갔다. 물안개공원 초입 꽃밭에서 어머니 사진을 여러 장 찍어줬다. 여기에 앉아보세요, 저기에 서 보세요, 요청하니 거절 않고 잘도 포즈를 취한다. 어머니와 단둘이 가평 제이드가든에 들렸다. 연신 다리가 아프다 불평이 끊이지 않으면서도 사진을 찍어준다고 하면 바로 모델 포즈로 들어간다. 젊어서부터 아버지께서 사진을 많이 찍어주신 티가 난다.  "어머니는 무슨 꽃 좋아하세요?"제이슨가든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물어봤다. "장미! 빨간 게 예쁘잖아"어머니는 꽃 이름을 잘 모른다. 그래도 좋아하는 꽃을 물어보니 0.1초 주저하지도 않고 대답하신다.   드디어 입원하는 날..

박수근미술관, 뿌리 깊게 한 세계를 깊이 파고드는 것

박수근미술관을 다녀왔다. 오래전부터 한번 가봐야지 생각했는데, 마침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다.  미술을 볼 줄 아는 눈이 부족하다. 미술작품이 왜 훌륭한지 그 이유를 잘 모른다. 그림의 종류도, 도구의 종류도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그동안 가봤던 대부분의 전시회는 다소 지겨운 일이었다. 흥미를 유발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박수근미술관은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즐겁고 유익한 관람 아닌가 싶다. 미술관 건물 자체도 매우 건축학적으로 특이했다. 무엇보다도 박수근의 작품들은 하나하나 시선을 잡아끌었다. 30~60년대 가난했던 우리 주변의 흔하디 흔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린 작품들이다. 울퉁불퉁한 표면에 검은색 굵은 선이 단순하면서도 착한 심성들을 드러낸다. 작가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해진다.   나더러 똑..

강원도 인제, 그 쓸쓸함에 대하여

강원도 인제에 대한 내 감정은 복잡다단하다. 쓸쓸함이라고 해야 할까, 애달프고 구슬프다. 1993년 1월 8일, 눈 덮인 인제에 첫 발을 내디뎠다. 1월 5일 강원도 춘성 102 보충대에 입소하고 3일 후 22사단을 배정받아 버스를 타고 고성으로 출발했다. 앞으로 펼쳐질 군생활에 대한 두려움, 홀로 감당해야 할 쓸쓸함, 고향으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떠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출발하는 날 눈이 내렸다. 크고 넓은 소양강을 구불구불 돌아 마침내 고개 하나 넘으니 마녀가 살 것 같은 산속 마을이 나타났다. 잠시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그땐 거기가 어딘지 몰랐고, 나중에야 인제라는 것을 알았다. 강원도 깊숙한 산골 훈련소로 가던 길 중간, 잠시 쉬었던 곳이 인제였다. 처..

고통에 의미가 있는가

팔당물안개공원에서 양귀비를 보았다. 빨간 꽃잎 안에 검은 십자가가 선명하게 보인다. 이게 마약 성분이 있는 건지 아닌지 난 잘 모르겠다. 마약 성분이 있는 거라면 재배 금지 식물이다. 사람들 왕래가 잦은 공원 길가에 한 송이 피어 있다면 마약 성분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지천에 들꽃이 널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진다. 형형색색의 들꽃 보는 재미가 있다. 산책이 부른다. 그러다가 오늘 우연히 양귀비를 보았다. 다른 꽃들에게 미안하지만 도드라지게 예뻤다. 양귀비는 매혹적인 만큼 치명적인 성분을 품고 있다. 그 부조화의 조화에 수긍이 간다.    몇 주 전, 제주 곶자왈 숲을 걷다 탱자나무를 보았다. 연푸른 숲속에 하얀 솜같이 하얀 꽃이 나무 위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려고 가까이 들여다보니 ..

닉네임을 똑바로 부르라!

스타벅스 e카드를 선물 받았다. 보통 e카드 선물 받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낸다. 스타벅스를 잘 가지 않기 때문이다. 어제는 강남에서 2시간 정도 아내를 기다려야 해서, 처음으로 e카드를 써보기로 했다. 밀크티를 주문한다. 앞에 한 5~6명 기다리고 있다. 닉네임을 불러준다. 오래전에 스타벅스 앱을 깔고, 닉네임을 '신의피리'로 저장해 뒀다. '신의피리'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나. 정신실의 김종필(피리) 둘. 하나님이 내게 세미한 바람소리로 말씀하시면 나는 그분의 피리가 되어 삶으로 연주한다. 아무래도 스타벅스에서 불림당할 닉네임이 좀 부적절한 느낌이 들어서, 다음에는 바꿔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찰나, 알바 여학생이 영수증과 나를 번갈아보면서 살짝 미소를 지으며 큰소리로 호명한다. "신의파리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