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안식월 제주한달살기 31

[제주안식10] 同行

정정조 집사님이 방문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장장 11시간 동안 내게 제주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해 주셨다. 사려니숲을 두어 시간 걷고, 성산일출봉을 조망하며 올레길 2코스 일부 구간을 걸었다. 내가 있는 서쪽과는 또 다른 풍광이고, 좀 더 이국적이다. 오랜만에 섭지코지도 가보고,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하도-월정을 지나 함덕해수욕장까지 왔다. 늘 자동차를 타고 그냥 지나쳤던 구석구석을 정성껏 안내하셨고, 함덕해수욕장 가운데 있는 델문도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했다. 일부러 오셨다. 출장 오셨다가 그냥 가도 되는데, 일부러 하루 시간을 내셔서 오셨다. 내가 차 없이 지내고 있다고 하니, 일부러 제주 동쪽으로 안내하셨다. 반나절만 안내하고 가셔도 괜찮은데, 일부러 저녁까지 동행해주셨다. 일부러 시간..

[제주안식9] 참소하는 목소리 vs. 현존하라는 목소리

색다른 아침을 맞고 싶었다. 차를 반납하는 날이니 어차피 제주시로 가야 한다. 차를 가지고 새미은총의동산으로 간다. 어제 오후 아내와 가려고 했는데 아내 몸이 안 좋아 가지 못했다. 혼자 가서 기분이라도 낼 겸 출발한다. 아침 8시라 아무도 없다. 혼자 드넓은 은총의 동산을 거닌다. 2천 년 전 십자가에 희생당하신 예수님의 그 죽음이 어쩌다 내 인생과 만나게 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비다. 의심 많은 도마와 같은 내게는 더더욱 신비다. 내 몸과 마음이 정결하게 되기를,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에 머물고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들기를, 그래서 이 괴로운 슬픔과 외로움이 잊히기를. 실은 은총의동산보다도 카페이시도로가 내 진정한 목적이다. 8:30부터 카페가 오픈한다. 늘 느끼는 거지만 한국 가톨릭..

[제주안식8] 사랑은 아픈 바람이다

아내는 하루종일 몸이 무거워 보인다. 표정은 그늘졌다. 불안감이 느껴진단다. 오전에 짐 싸들고 나갔다가 점심때 다시 숙소로 들어왔다. 좀 쉬었다가 회복한 후, 다시 짐을 챙겨 나간다. 아내는 저녁때 김포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비가 오니 어디 걷지도 못한다. 애월 카페거리를 갔다가 기념품 가게에 들려 소소한 선물들을 함께 골랐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아내가 집에 가기 전 '고기국수'를 꼭 먹고 싶어 했다. 두어 군데 식당을 찾아갔다가 실패한 후 세 번째 집을 만났다. 말로만 듣던 돔베고기를 먹었다. 이제 더 이상 제주토속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겠다. 충분히 만족한다. 공항 근처 카페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여전히 아내의 표정이 밝지 않다. 아내는 표정이 정직하다. 밝음과 흐림이 분명하다. 얼굴 표..

[제주안식7] 내가 좋아?

차귀도 뒤로 해가 넘어간다. 마침 그 시간, JP가 그 일몰 장면을 목격한다. 그냥 눈으로만 보기엔 아까운지 카메라에 담는다. 카메라에 담긴 사진은 눈에 담긴 장면보다 못하다. 대개 그렇다. 해가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이제 안식을 목전에 두고 마지막 힘을 낼 때, 마침 배가 지나고 배행기가 지나면서 풍경을 더 아름답게 꾸민다. 나는 일몰의 순간을 주목하는데, 누군가는 일몰의 순간을 주목하는 나를 주목한다. ss는 자아를 잊은 jp를 주목하고 jp는 늘 ss를 주목한다. 누군가가 나를 주목하고 있다는 인식, 그것도 나를 좋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인식은 나를 긍정하는 힘이다. 결혼 25주년이 되었다. 빠르다.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좋아?" 그녀는 까르르 웃는다. "내가 왜 좋아?" 더..

[제주안식6] 기다리는 하루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다. 아침식사 후 청소를 한다. 마치 누군가의 방문을 준비하듯. 점심을 먹는다. 누군가와 함께 먹을 메뉴를 대비하듯.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다. 누군가에게 전해줄 문장을 찾듯. 오늘은 목적이 분명한 하루다. 저녁에 그분이 오신다. 그 만남을 기다리며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시간을 체크하고, 끊임없이 생각 속에서 대화를 이어간다. 오롯이 그 순간에 머물러지지가 않는다.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으나, 이미 내 마음에 와있다. 그(녀)가 내 안에, 내가 그(녀) 안에 있다.

[제주안식5] 걷고 먹고 만나는 일이 이렇게 감사한 일이라니

목회자가 된 후 처음으로 안식월을 맞았다. 3개월이다. 첫 번째 달은 뉴질랜드에 다녀왔다. 사역과 여행을 겸했다. 결혼 25주년을 맞은 기념 성격도 있다. 두 번째 달은 제주에서 혼자 지낸다. 소위 제주한달살기를 하는 것이다. 앞으로 한 달간 나는 혼자다. 해야 할 의무도 없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다. 그냥 살면 된다. 가고 싶은 곳이 떠오르면 가는 방법을 검색해서 가면 된다.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만남 오늘 사전투표 첫날이다. 이성실 목사님과 함께 인근 한경체육관에서 사전투표를 했다. 이성실 목사님은 사전투표제도를 그동안 몰랐다 한다. 이 좋은 제도를! 함께 투표하고 사진 한 컷! 서로 누굴 찍었는지에 대해선 전혀 말하지 않았다. 이성실 목사님은 2년 전 제주로 내려왔다. 목..

[제주안식4] 무명서점에서 만난 책

오늘은 비소식이 없다. 무조건 걷는다. 최대한 걷는다. 생각만 해도 들뜬다. 펜션 1층에 있는 "카페온결"이 오늘 오픈한다. 커피가 고프다. 걸을 준비를 갖추고 카페온결에 들려 커피 한잔 마신다. 어젯밤부터 읽기 시작한 승효상의 을 꺼냈다. 2019년 로마-이탈리아-프랑스에 있는 수도원을 다녀온 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전형적인 보수신앙을 가지진 않았으나 영성이 깃들어 있다. 그의 건축 철학은 그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5월에 2주간 베네틱토 수도원 순례를 다녀올 계획이다. 여행 전에 수도원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려고 자료 검색하다 알게 됐는데, 재밌고 유익하다. 씩씩하게 밖으로 나왔다. 오늘 걸을 곳은 월령선인장마을과 금능포구다. 야속하게도 가랑비(?..

[제주안식3] 4월3일에 제주 두모리를 걷다 거라사 광인을 생각해 본다

어제 오후부터 내린 비가 밤새 이어지더니 아침에도 그치지 않는다. 날씨 정보를 보니 저녁까지 내내 비가 온다 한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늘 읽을 책과 보이차 한잔을 내렸다. 잠시 비가 소강상태가 되자 얼른 창문을 열고 창가에 앉았다. 책 서너 권을 사두고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로완 윌리엄스의 책을 펼쳤다. 최근 중세 수도원에 대해 관심이 생겨 연이어 관련 서적들을 읽었다. 수도원의 역사 중심엔 베네딕토가 있다.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한 나는 베네딕토를 모른다. 영화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좀 알지만. 그런데 2천 년의 기독교 교회사 중에 가장 오랫동안 큰 영향을 미친 이가 베네딕토라는데,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게 좀 부끄럽게 여겨진다. 3개월 안식기간 중에 내가 관심을 ..

[제주안식2] 금등리 마을 산책

내가 머문 숙소는 제주 서쪽 끝이다. 이른 아침에 금등리 마을 탐색을 나선다. 숙소를 나오자 낮으막한 현무암 돌담과 유채꽃이 반긴다. 여기저기 양파밭이 펼쳐져 있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수확철인가 보다. 신창풍차해변도로에서 바닷가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전형적인 제주 바닷가 마을길이다. 길 끝자락에 서니 검은 현무암과 10개의 자이언트 풍차가 그림 같이 펼쳐진다. 금등리 마을 안으로 들어가본다. 제주의 돌담길이 정겹다. 전형적인 옛집과 서울 사람들이 내려와서 짓고 사는 현대식 가옥들이 섞여 있다. 동네 지형을 해치지는 않지만 이게 이 마을에 좋은 건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은 판포포구쪽이다. 거기서 점심식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닷물 색깔이 유난히 달라 보인다. 마치 동남아 휴양지에서 볼 만..

[제주안식1] 아픈 바람

공항버스를 탔다. 운전사께서 운전을 시작하다 말고 뒤돌아보며 내게 묻는다. "국내선 맞지요?" "네" "근데 가방이 꼭 국제선 타는 사람 같네요." "오래 있어야 해서요." 오늘부터 4/29(월)까지 28박 29일 제주에서 혼자 한달살이를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장소/숙소가 중요하다. 리서치를 한다. 내 형편으로는 좋은 환경, 좋은 숙소는 택도 없다. 감사하게도 제주에서 올해 담임목사가 된 이성실 목사님이 도움을 주셨다. 교인이 운영하는 펜션 늘랑빌(제주도 한경면 일주서로 4428, 카페온결)을 소개해주셨는데, 목회자는 50% 할인이란다. 한적한 곳에 3층짜리 건물이 있다. 1층은 예쁘게 생긴 카페다. 3층 숙소는 복층으로 되어 있고, 창문으로 길 건너 바다가 보인다. 꿈에 그리던 장소다. 한 달간 피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