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책에서 만난 문장 57

<부끄러움>, 아니 에르노

구정 연휴 기간에 읽을 만한 얇은 소설을 찾았다. 아내의 추천으로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소설인줄 알고 읽었는데 소설이기보다는 어린 시절에 대한 여러 편린들을 추적하는 성찰적 글이라 느껴졌다. 그런데 중간 어느 지점에서부터 공명이 일어났다. 저자가 어린 시절, 그 심각한 사건(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던 사건) 이후로, 자신의 가정과 부모 배경이 모두 사립학교에 다니던 저자의 동료, 교사 등의 사람들로부터 경멸의 대상에 속한다는 것을 느낀다. 부모의 처세술, 처세에 근거한 얕은 가정 교육,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말과 행동, 그 이면의 이중성, 기독교 사립학교에서의 의무적 종교교육이 가져다 주는 수치심... 저자는 그 사건이 있었던 열두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싹튼 부끄..

<인간 치유>, 폴 투르니에

폴 투르니에의 는 그의 첫 번째 책이자, 입문서다.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서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 본질에 대한 이런 이해 속에서 폴 투르니에는 정신과 환자들을 치료해 왔는데, 그는 기도와 묵상이 얼마나 큰 처방인지 이해해왔다. "의식계의 위축"이란 학설은 피에르 재니트가 주장한 것으로 정신분석학 학자들에 의하여 발전하였다. 이 학설은 신경증에 대하여 가장 뛰어난 설명을 제시했다. 이 방면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심층심리에는 자아의 도덕적 이상에 역행하는 성향이 있는데, 이 성향의 실제를 스스로 의식하였을 경우 나 또는 이와 같은 성향이 자신의 양심을 외면하고 행동으로 나타날 경우, 이러한 죄책감 또는 행동은 의식계에서 축출당하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하였..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선행을 비범한 시선으로 묘사하여 위대하게 만든다. 그의 얇은 중단편 소설 두 권을 연달아 읽었는데, 왠지 매우 감동적인 설교를 들은 것 같은 느낌이다. 내 안에 선한 바람을 일으킨다. 나도 선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 싶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는 두 종류의 생각이 충돌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평범성을 다소 이기적으로, 그러나 소시민적으로 지키려는 생각이다. 적당히 타인의 불행에 무관심하는 태도다.  주인공 펄롱의 아내 아일린의 생각이 그렇다. 펄롱이 수녀원에서 본 여자 아이들의 불행한 형편에 대해서 넌지시 이야기하자, 아일린은 왠지 모를 방어적 태도로 남편을 제지하려 한다. "이런 생각 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아일린이 말했다. "생각할수록 울적해지기만 한다고...

<잠수종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잠수종이 한결 덜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의 정신은 비로소 나비처럼 나들이길에 나선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시간 속으로, 혹은 공간을 넘나들며 날아다닐 수도 있다. 불의 나라를 방문하기도 하고, 미다스 왕의 황금 궁전을 거닐 수도 있다. 「잠수종과 나비」(장 도미니크 보비), 16p   40대 초반의 남자가 뇌졸증으로 쓰러졌다. 20여일이 지나고 깼으나 전신이 마비됐다. 정신은 온전한데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의사들은 이 증상을 '로크트 인 신드롬(locked-in syndrome, 감금증후군)이라고 불렀다. 그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부위는 왼쪽 눈을 깜빡이는 것 뿐이다.  프랑스의 패션잡지 엘르 지의 편집장이었던 장 도미니크 보비는 잘 나가던 삶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인생의 사계절>, 폴 투르니에

한 10여 년 만에 폴 투르니에의 얇은 책을 한 권 읽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다 이해가 된다.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뜻이겠다. 올해 이 분이 쓴 책들을 다시 정독해 보면 좋겠다. "복음이 요구하는 자기 부인이란 영원히 유아기로 뒷걸음질하는, 절단된 인생으로 퇴행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기 부인이란 좀 더 큰 충만함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자신의 인생 주도권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60p. 3. 기독교, 자유인가 구속인가 中) "좋은 열매를 거두려면 반드시 충분히 무르익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활동의 계절인 여름을 활동만으로 채워서는 안 됩니다. 묵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계절이 깊어 갈수록 묵상의 시간에 점점 더 많은 자리를 내줘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묵상 ..

<인생이라는 등산길에서>, 안셀름 그륀

독일어에서 '길을 가다 wandern'와 '변화하다 wandeln'라는 단어는 '방향을 돌리다 wenden'라는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다. 즉, '길을 가다'라는 단어에는 계속해서 방향을 돌린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데, 이는 길을 걸으면서 우리 안의 무엇인가가 변화한다는 뜻이다. 그 변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점점 더 자신의 고유한 상태로 다가간다는 것을 말한다. 걷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흐리게 하고 때론 어둡게 만드는 다양한 상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하느님이 만들어 내신 본래의 우리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pp. 89-90 산행(山行)은 그 자체로도 참 좋은 것이다. 무엇보다 건강에 좋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산행은..

<매혹적인 악덕들>(The Glittering Vices), 레베카 코닌딕 드영

책을 읽다 다음 부분을 읽을 때 움찔했다. 나쁜 짓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숨겨두고 싶었던 내 비밀스러운 약점을 들킨 사람처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젊은 시절에 대한 선명한 거울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몇 년 후, 용기의 미덕에 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을 읽다가 나는 우연히 “영혼의 왜소함”을 뜻하는, 그가 소심함(pusillanimity)이라고 칭한 악덕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아퀴나스는 이 악덕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모든 소명으로부터 위축된 삶을 산다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이 해낼 수 있는 큰일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수고와 난관에 직면하면 움츠러들며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소심함은..

<천국과 지옥의 이혼>, C. S. 루이스

죽음은 기정사실이다. 다만 그때를 모를 뿐이다. 모르고 있다가 벼락같이 맞이하는 것보다는 잘 이해하고 있으면서 천천히 대비하며 기대하는 것이 지혜다. 나는 꽤 준비되어 있다. 적어도 죽음이 두렵진 않다. 그다음 세계에 대해서도 적잖은 설렘이 있다. M. 스캇 펙과 C. S. 루이스 덕분이다. 두 천재 작가들이 신학과 판타지를 적절히 섞어서 소망 가득한 소설을 썼다.  "지상은 결국 별개의 장소가 아님을 깨닫게 되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천국 대신 지상을 선택한 사람은 처음부터 지옥의 한 구역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또 지상을 천국 다음 자리에 놓은 사람은 지상이 애초부터 천국의 일부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10p)  루이스는 아직 그 사후세계에 가보기도 전에, 이 지상의 삶에서 그 세계의 특징을 ..

<달라스 윌라드>, 게리 W. 문

2020년 5월 20일에 전기가 출간되었다. 코로나 기간이었다.  곧장 구입했다. 6월 19일에 이 책을 읽었다. 2021년 12월에 두 번째로 읽었다. 2022년 8월에 다시 읽었고, 이번 2024년 8월 여름휴가를 맞아 네 번째 읽었다. 전기를 거의 해마다 읽은 것은 달라스 위라드가 유일하다.  나는 '영혼'을 잃을 뻔했다. 2020년 경이었다. 그때 달라스 윌라드가 책을 통해 내게 말해줬다. "너는 목사로서 지금 여기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아직도 모르느냐?" 예수님이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 시대 목사들에게 적용한 말을 다시 내게 적용한 것이다. 나는 정직하게 성찰했다. 지금 내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실체와 능력에 대해서 나는 하나도 아는 바가 없었다. 내 영혼은 거의 ..

<길 위에서>, 안셀름 그륀

나는 걷기를 사랑한다. 홀로 걸을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온다. 나는 설교를 준비할 때, 반드시 홀로 걷는 시간을 갖는다.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문의 구조를 짠 후, 최종적인 설교문 작성을 앞두고 나는 걷는다. 여기저기 산개했던 생각들과 개념들이 하나로 꿰어진다. 두 다리를 움직여 부지런히 걸을 때, 몸은 사고를 원활하게 하고 가장 빛나는 에너지가 분출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걷는다. 걸을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안셀름 그륀 신부의 책 제목이 너무 매력적이다. . 부제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걷기의 신학" 딱 내 스타일이다. 성경에는 '걷기'에 대한 은유가 많다. 많은 이들이 걸으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걸으면서 예배를 드렸으며, 걸으면서 인생을 설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