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순례, 그 땅을 걷다 35

[수도원기행13: 후기] 똑똑해 보이려고 말하지 않으며

휴대폰으로 지난 수도원 여행 사진을 훑어본다. 꿈만 같다. 아주 기분 좋은 긴 꿈이었다. 순례가 내 일상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25일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선한 다짐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여러 수도원을 다녀오며 작은 소망의 불꽃이 타오른다. 무엇보다도 기도가 깊어졌으면 좋겠다. 예전에 기도는 힘을 써야 하고 시간을 내야 하며 마음을 쏟아야 하는 고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젠 기도 안 하는 것이 기도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의식이 깨어 있는 모든 순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의 영과 친밀한 사귐이 더 깊어졌으면 좋겠다. 들숨과 날숨의 무한 반복으로 생명이 유지되듯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영적 들숨과 날숨을 무한 반복하여 영혼이..

[수도원기행12] 평화로 가는 길

마지막 날이다. 언제 끝이 오나 싶었는데 금세 그날이 왔다. 아쉽지만, 아쉬움을 주목하지 않겠다. 끝이지만 끝을 생각하지 않겠다. 충분히 좋은 시간이었고, 충분히 쉬었고, 모든 것이 충분했다. 그러니 내일 일은 걱정하지 않겠다.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할 것이라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여기를 주목하고 나는 지금 여기에서 내 삶을 에워싼 은혜를 만끽할 것이다.  독일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릴 장소는 마울브론 수도원(Kloster Maulbronn)이다. 이 수도원에 대해 역시 나는 까막눈이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위키사전을 검색해 본다. 12세기에 처음 세워진 이 수도원은 시토회가 터를 잡고 시작한 곳이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부흥하고 성장하는 수도원 운동이 세속의 지원과 부에 서서히 ..

[수도원기행11] 끝자락에서 다시 시작된 순례

독일 바이에른 주에 있는 베네딕트회 소속의 수도원을 방문한다. 매일 매 순간 이 기이한 순간의 이유를 생각한다. 아내가 처음 이 여행을 제안했을 때 나는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여러 번 권유하자 다소 짜증이 나기도 했다. 개신교 목사가 도대체 왜 가톨릭 신자들 속에 껴서 베네딕토 수도원에 가야 하는지 나는 단 하나도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다 마음이 바뀐 것은 오로지 아내 때문이다.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고, 그토록 권유하는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지금은 잘 모르지만 믿고 함께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브라함이 가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다. 가야 할 이유도 잘 모르고, 가야 할 방향도 잘 몰랐지만, 그는 부르시는 분의 그 거듭되는 속삭임을 따라 미지의 땅으..

[수도원기행10] 아무 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단체 여행 탐방 시, 여행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가이드다. 가이드의 역할이 여행의 성패를 가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이드는 단지 지식만 많아서도 안된다. 말만 잘해서도 안된다. 물론 가이드는 말을 잘해야 하고, 아는 것도 많아야 한다. 가이드가 친절하지 않으면 내내 갈등이 발생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순발력 있게 대처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결정 내리지 못하면 여행객들은 불안해하고 당황한다. 가이드는 유능해야 하고, 또한 여행객들에게 친절해야 한다. 모든 지도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이긴 하지만, 짧은 기간 가이드를 통해서 리더십의 특성을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잠깐 보고 말 사람들이니 알게 뭐냐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수도원기행9] 도나우강에서 왈츠를 추다

가톨릭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를 향한 신심이 크다. 베드로 사도, 바울 사도를 흠모하는 것 못지 않다. 모성 때문일까. 품어주는 사랑, 아픈 마음 만져주는 사랑, 무서운 아빠에게 대신 잘 전달해 주시는 자상한 어머니의 사랑... 성모 마리아는 그런 모성의 사랑을 상징하는 듯하다. 장미 묵주를 들고 묵주기도를 드리는 신자들은 하루 5단, 10단 정성껏 마음을 모은다. '간절한 정성'이 담긴 기도의 시간이기 때문이리라.  수도원 여정 중 알퇴팅(Altoetting) 성모 성지 방문이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순례객들의 몸이 들썩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곳은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이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심장이며 유럽교회 본질 중 하나라고 밝힌 성모신심 순례지라 한다. 성당은 마을 한가운데 있고, 그 주위로 여..

[수도원기행8] 에탈수도원에서 본회퍼를 만나다

에탈, 아름답고 매혹적인 마을이다.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알프스 산맥 한 끝자락에 자리한 에탈은 독일 바이에른에서 가장 큰 자연보호 구역인 암머가우 알프스 품 언저리에 자리한다. 웅장한 산을 배경 삼은 에탈 수도원(Kloster Ettal)은 두 팔을 벌려 모든 순례객들을 품는 듯한 폼으로 순례객들을 맞이한다. 지금까지 본 수도원과는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 그동안 줄곧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의 수도원을 방문했는데, 에탈 수도원은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에탈 수도원 성당의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두 번째 안쪽 문 왼쪽으로 죽은 이들을 기념하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뜻밖의 이름을 발견한다. 내 젊은 날 영혼을 뜨겁게 만들어줬던 사람, '디트리히 본회퍼'다. 아니, 그..

[수도원기행7] 잃은 만큼 얻는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독일 뮌헨으로 건너왔다. 뮌헨은 독일어로 "수도자들의 공간(forum apud Munichen. 현대 독일어로 치면 bei den Mönchen)"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는데,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이 도시를 건립했다 한다. 그래서 뮌헨의 휘장에는 수도자 그림이 새겨져 있다. 비행기에서 내려 출구로 나오기까지 별다른 검색 없이 금새 나왔다. 유럽연합국가 간에 맺은 조약 때문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이렇게 장벽을 없애니 얼마나 좋은가. 날씨가 춥다. 로마와 다르다. 뮌헨이 해발 600여 미터 고지란다. 그러고 보니 알프스 산맥과도 가깝다. 빙하로 덮힌 알프스 산을 볼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오늘은 날씨가 흐리다. 언젠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이 오겠지.  가이드를 만난다. 가..

[수도원기행6] 무덤은 소박한게 좋다

로마에 있는 4대 대성당을 방문하는 마음이 이상하게 착잡하다. 착잡한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어떤 종교적 의무가 있는 것 같다. 미안해하고, 착잡해해야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최소한의 자격이 있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런 마음이 나와 남 사이의 '선'을 결국 긋게 만든다. 감각적으로는 로마의 화려한 성당들에 감탄하고 즐거워하면서, 동시에 자꾸 나도 모르게 거리 두기를 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이들과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의 신심을 의심해서도 안된다.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인파들도 저마다 사정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길이 있다. 저마다 하늘을 향해 호소해야 할 이유가 있다. 형식이 다르고, 방식과 절차와 전례가 다를 뿐이다. 그렇게 허다하게 많은 인파 중에 나..

[수도원기행5]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 19:21)2015년도에 바울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 터키-그리스를 다녀온 적이 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가 걸었던 길을 걷고, 그가 설교했던 아레오바고를 오르고, 그가 세례를 줬던 빌립보 강기테스 강가에 앉았을 때, 형용할 수 없는 은총이 쏟아져 내렸다. 순례의 참 의미를 알았다. 그때 비로소 로마가 가고 싶어졌다. 다른 이유는 없다. 바울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은 것이 제일 큰 이유다. 그리고 드디어 로마에 입성했다. 콜로세움, 포로 로마노, 개선문 등을 보았다. 가히 로마는 살아있는 역사유물관이다. 로마 시내도 잠시 걷는다. 전 세계 모든 민족이 다 와있는 것 같다. 주말이라 그런지 시내엔 형형색색의 얼굴빛을 가진 이들이 붐빈다.눈은 즐겁고, 다리는 무겁다..

[수도원기행4] 작고 평범하고 단조로워서 좋은 것

시차 적응 중이다. 첫날은 새벽 1시에 깼고, 둘째 날은 새벽 2시, 셋째 날은 새벽 4시에 깼다. 몸이 아주 정직하게 반응한다. 새벽에 가장 정신이 맑다. 글 쓰기 좋은 시간이다. 고요한 새벽, 글 쓰기를 마치고, 아직 글 쓰고 있는 아내를 방에 두고 혼자 밖으로 나선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 생각보다 춥다. 다시 들어가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 아직 수도원 관리인은 출근 전이다. 이왕 이리 되었으니 걷는 수밖에 없다. 스콜라스티카 수도원 밖으로 나오니 수비아꼬 수도원까지 갈 수 있는 이정표가 나온다. 걷는다. 이른 새벽에 홀로 ‘거룩한 동굴’(Sacro Speco)로 올라간다. 기도하기 위해 동굴로 들어간 이, 동굴로 들어간 이의 말씀을 들으러 올라가는 이들, 그들이 걸어 올라간 자연 그대로의 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