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23] 환대

신의피리 2024. 4. 23. 18:19

글을 쓰려고 앉았다. 첫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한다. 무슨 글을 써야 할지 아직도 명료하지 않다. 그럼에도 글을 쓰기 시작한다. 괜찮다. 예전엔 사유로 글을 썼다면, 이젠 손가락으로 사유한다. 내 머릿속엔 모든 재료가 있다. 내 몸이 기억한다. 그것을 분류하고 배열하여 재종합하는 것은 사유가 하는 게 아니다. 손가락이 한다. 노트북을 켜고 하얀 페이지를 펼쳐놓는다. 자판 위에 손가락을 얹는다. 손가락의 움직임을 머리가 따라가 본다. 복잡하게 부유하던 개념과 이미지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손가락이 사유를 시작했다. 손가락이 의미를 창출하기 위해 두뇌에 자극을 주었다. 손가락을 믿는다. 열 개의 손가락이 서로 신비하게 조합하여 움직이는 것에 내 존재를 맡긴다. 손가락에서 손가락으로 사유의 전기가 들어오고 하루의 경험이 무의식 안에서 널브러져 있다 하나의 생명과 의미를 생성한다. 

 

손가락이 두뇌를 점화시켰다. 이제 손가락에 의존한다. 사유는 뒤따른다. 몸도 따를 것이고, 기억과 감정도 다시 활성화 될 것이다. 

 

조수리에 있는 '한양동식당'까지 걷는다. 조수교회 성도가 운영하는 한양동식당은 1인 1만원짜리 뷔페식당이다. 시골 내륙 한가운데에 있다. 관광지도 아니지만, 이차선 도로 좌우로 매일 차들이 즐비하게 주차하고 있다. 가성비 좋은 식당으로 알려졌단다. 맛도 좋단다. 제주생활을 끝나기 전에 한 번은 가야 했는데, 오늘 밖에 시간이 없다. 보행을 위해 무장하고 6km 금등리 시골길을 걷는다. 걷는 일은 때로 재미있다. 별것 아닌 흔하디 흔한 것들에 시선이 가기 때문이다. 얼마 전 썼듯이 느리게 걸으면 일상의 생명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마늘 밭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밭일을 하는 할머니가 보인다. 평생 했을 밭일 일 것이다. 어쩌면 땅 부자일지도 모른다. 자산으로 따지면 부자일 지 모르나 현금은 얼마 없는 가난한 노인일 것이다. 자식들은 내륙으로 갔을 것이다. 저 땅과 오래된 집은 내륙으로 간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질 것이다. 평생 새벽부터 저녁까지 밭일을 한 여인의 수고는 내륙으로 간 자식들의 혜택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도 행복할까.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제주 시골에서 밭일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축복한다. 

 

 

금등리에서 조수리로 가는 2차선 도로 중간에 구멍이 났다. 그 안에 작은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푸른 잎의 머리를 빼곡 내놓고 있다. 자동차 바퀴들의 질주를 피해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 흙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한양동 식당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도착했다. 아점이다. 벌써 차들이 많다. 인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가족단위로 제주에 놀러온 관광객들이 바글바글하다. 매일 주메뉴가 달라진다 한단다. 수육이 맛있다. 고추튀김도 맛있다. 작은 갈치들도 맛있다. 내가 좋아하는 잡채도 맛있다. 각종 김치들도 맛있다. 바나나도 맛있다. 음식에 정성이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운영하는 한양동식당은 하루에 4백 명이 넘게 온단다. 두세 번은 더 먹고 싶었으나, 내 위장은 작다. 주위를 둘러보니 웬만한 여성들보다도 내가 더 적게 먹는 듯하다. 4세기 사막 수도사 겸 신학자인 에바그리우스는 '탐식'도 인간의 근원적인 8가지 죄악 중의 하나로 보았다. 내게 탐식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내 마음이 엉망진창이 되면 맛있는 음식을 과하게 찾는 경향이 없지 않다.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줄 아는 것과 너무 과하게 탐하지 않는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목회자일수록 더더욱 균형이 중요하다. 어쩌면 그런 생각들이 내 탐식을 제어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칭찬했다. 

 

이제 오름에 오를 시간이다. 저지오름을 오른다. 분화구까지 온통 숲으로 채워진 아름다운 오름이라 들었다. 걷는 이들이 적다. 어쩌다 만나면 죄다 중년의 부부들이다. 젊은이는 없다. 혼자 걷는 이도 없다. 아내가 보고 싶다. 

저지오름

 

저지오름의 정상에 전망대가 있다. 오름은 자고로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는 맛에 오른다. 그런데 전망대 계단 입구가 막혀있다. 전망대 1층 안에 관리하는 분이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다. 탐방객들이 지나면서 다들 불평한다. 전망대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몰라 아쉬워한다. 용감하게 내가 나서서 일하는 분에게 물어본다. "계단을 막아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저쪽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저기에 전화해서 물어보세요!" 물어본 내가 무안해졌다. 그냥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은 못 올라가요, 라고 말해주면 안 되나? 굳이 퉁명스럽게 말할 필요가 있는가. 저기 제주녹색관리부에 전화해서 물어보라니! 

 

부목사 생활을 할 때 담임에게 여러번 들은 말 중에 하나는 '목회자는 공무원이 아니다. 공무원처럼 성도들을 대하지 말라'였다. 공무원을 무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무언가 물어보거나 도움을 청할 때, 내 관할이 아니니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라는 식으로 하지 말라는 뜻이다. "제가 알아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섬기는 것이 목회자이고, 그런 태도가 곧 목사의 자세라는 것이다. 동의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이 많고 바빠지면 점점 내면에 짜증이 차오른다. 내가 이러려고 이렇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나의 그 무의미한 데다가 바쁘게 하는 '일들'을 더 바쁘게 만드는 성도들의 질문은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39-4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성도는 악인이 아니지 않는가. 악인에게도 저렇게 하라 하셨는데, 성도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탐방객들을 대하는 그 관리자의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나는 나의 자리에서, 내게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답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이 걸었다. 2만보나 걸었다. 숙소로 들어온다. 이젠 내 집처럼 포근함이 있다. '카페온결'이 오늘은 휴무인데 문이 열렸다. 매니저 집사님과 오랜만에 인사한다. 낮에 한양동식당을 다녀왔다 하니, 저녁으로 수프를 서비스로 내어주신다. 저녁을 굶을까 계란프라이를 먹을까 비비고 만두 2알을 먹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했는데, 예기치 못한 환대를 받는다.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내 형편과 상황을 순간적으로 파악하여 근사하 수프를 제공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환대'다. 환대는 손님의 자존감을 높여준다. 매니저님은 나를 대접했지만 부지불식 중에 주님을 대접한 것이 되었으리라.

카페온결

 

누구든 제주 한경면을 방문하거나 지나거든 '카페온결'을 들리시라. 환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카페온결 

https://www.instagram.com/cafe.on.fl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