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기고/양화진 16

공동체

21교구 소식지 마지막호. 2015/12/13 교구소식지 마지막호, ‘공동체’ 지난 여름 지리산 종주를 하다가 불현 듯 ‘교구소식지’가 떠올랐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연결’에 대한 갈망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있다. 타인의 얼굴에서 나와의 공통점을 찾고, 그래서 안전을 느끼고 힘을 얻고 싶어 한다. 그 연결망을 설치하여 서로서로 잇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는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다. 실은 이것은 첫 번째 갈망이 실현된 결론일 것이다. 다들 외딴섬처럼 따로따로 각자 자신만의 마을을 이루고 있는 12개의 구역이 실은 하나의 공동체였음을 어떻게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교구소식지’가 발행되었다. 세 번째는 내 자신의 정체성에..

기고/양화진 2018.06.08

K에게

21교구 소식지 9호. 2015/12/06 K에게 K! 파르르 떨리는 입술, 그렁그렁한 네 눈물이 잊혀지지 않는구나. 얼마나 마음 아팠으면 꾹꾹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흐를까.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만, 그러질 못해 내내 미안했구나. 생각해보니 나도 네 나이 때쯤이 인생 중 제일 아픈 순간이었지 싶다. 타인에게 내 진심 가 닿지 않고, 내 앞에 놓인 길의 방향은 흐릿하기만 하며, 서 있는 내 품세는 어정쩡하기만 하니, 그저 내 신세 처량하기만 했었지. 하나님께 젊음 바쳐 애써온 것의 대가가 이런 것인가 싶어 하소연만 나왔었고. 내 몰골이 이런데 내가 무슨 사람 섬긴다고 앞에 서 있을까 하는 자격지심만 한없이 커졌었지. 그래, 그래서 멋지게 잠적하고 싶은 충동이 참 많이 일어났었구나. K! 네가 네 자신을 평..

기고/양화진 2018.06.08

비교의식 내려놓기

21교구 소식지 7호. 2015/11/08 비교의식 내려놓기 내 내면에 ‘비교의식’이라는 것이 언제 처음 태동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크고 좌우로 가늘게 찢어진 눈에 광대뼈가 심하게 튀어나온 ‘진표’라는 친구에게 은근한 열패감을 느끼곤 했었다. 목소리 큰 진표의 기세에 눌려 지내던 나는 어느날 그 친구를 바닥에 눕히고서는 배 위에 올라타 양 팔을 무릎으로 누르며 ‘항복해!’라며 소리 지른 기억이 있다. 내 힘이 더 셌고, 나는 승리감으로 우쭐거렸다. 그렇지만 내 인생 중에 그렇게 우쭐거린 순간은 많지 않았다. 움츠러든 순간이 백배는 더 많을 것이다. 매사 우월감의 순간을 지향했지만 대개는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내면의 전쟁이 다 끝난 듯 보였던 신..

기고/양화진 2018.06.08

복면가왕

21교구 소식지 4호. 2015/10/18 복면가왕 집에 TV 없이 산 지 17년째다. 결혼할 때 아내와 TV 없이 신혼 1년을 살아보자고 결심한 게 벌써 17년이 되었다. 지금이야 종종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세상에 들락날락 하니 심심할 날이 없지만, 신혼 초엔 어찌 지냈나 모르겠다. 어쨌든 목표는 이랬다. 소중한 저녁 시간에 TV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대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는 게 우리의 바램이었다. 그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종종 TV 타령을 한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테블릿 PC를 통해 일주일에 딱 한 번 온가족이 모여 ‘개그콘서트’를 본다. 아이들이 하도 하소연을 하다 보니,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서너개 더 늘었다. 아이들은 ‘런닝맨’, ‘무한도전’을 ..

기고/양화진 2018.06.08

눈물로 드리는 새벽

21교구 소식지 6호. 2015/11/01 눈물로 드리는 새벽 딱히 외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쓸쓸하다. 가을 탓이다. 10월에서 11월로 넘어가는 이 시간을 단 한 번도 그냥 지나친 적이 없다. 나뿐이랴! 이 계절의 고개를 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법이다. 곧 서른을 앞둔 스물아홉만 힘든 게 아니다. 인생의 불완전성 때문에 흔들리는 20대만 힘든 게 아니다. 중학교 졸업을 준비하는 우리 딸내미도 인생살이를 고달파한다. 마흔 중반을 지나고 있는 나도 쓸쓸한 정서가 겹겹이 쌓인다. 이 허전함을 어찌하랴! 적막한 새벽, 교회당 구석에 앉아 십자가를 응시한다. 위로부터 오는 소리는 없다.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잡소리들이 생각을 흩트려 놓는다. ‘한 말씀만 하소서’…. 갈증난 마음에 나직이 읊조려..

기고/양화진 2015.10.27

지금 여기, 주어진 작은 일에서 행복하기

21교구 소식지 5호. 2015/10/25 지금 여기, 주어진 작은 일에서 행복하기 교구소식지 칼럼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다. 딱 마음에 드는 주제가 안 생긴다. 흰 백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떠오르는 단어들을 썼다 지웠다 하기가 벌써 한 시간째다. 조급함의 바람이 불고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괜한 일 했나보다 하는 후회와 글쓰기 실력의 열패감 때문에 잠시 낙담한다.글쓰기를 중단하고 시선을 돌린다. 이디오피아 예가체프 커피 한 잔을 찬찬히 내리니 고소한 향기가 번져가는 게 보인다. 글렌 굴드가 1955년도에 연주한 바흐(Bach)의 Goldberg Variations을 들으니 번민이 일거에 사라진다. 그리고 하얀 백지 위에 내 마음을 살며시 포개 얹어본다. 주님과 응접실에서 마주 앉은 느낌이다. “..

기고/양화진 2015.10.18

요셉은 우리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까?

21교구 소식지 3호. 2015/10/04 요셉은 우리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까? 20대 시절, 불현 듯 의문이 생겼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랑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너무 믿음이 좋았고, 너무 영웅적이고, 너무 영화적이었다. 나는 의심도 많고, 근심걱정도 많고, 분노할 때도 종종 있는데, 성경 인물들은 죄다 영적 거장들이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거물들이었다. 특히 요셉이 그랬다. 요셉은 17살 때 배다른 형제들의 질투 때문에 이집트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됐다. 이집트 경호대장 보디발의 가정총무가 되어 금세 인정받았지만, 이내 주인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결과 강간미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흔들리지 않았다. 남 탓하지도 않았다.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았다..

기고/양화진 2015.09.30

권찰(勸察)

21교구 소식지 2호. 2015/09/20 권찰(勸察)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청년부 소그룹 이름이 ‘구역’인 것도 조금 촌스러웠는데, 구역장을 도와 구역을 섬기는 청년 리더를 가리켜 ‘권찰’이라 부르니 말이다. 사전을 찾아봤다. 권 : 勸 권할 권 / 찰 : 察 살필 찰권찰 : [기독] 장로교에서, 신자의 가정 형편을 살피고 찾아가서 만나 보는 직무. 또는 그 일을 하는 사람. 곰곰이 뜻을 음미하다 보니 한 사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우리 어머님이다. 어머님께서 권찰이라는 직분을 섬겼던 내 어린 시절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구역 식구들 집을 자주 들락거리셨다. 혼자 계시는 어르신에게 쌀을 갖다 드리기도 하고, 누구 누가 아프다 하면 늦은 밤 홀로 부엌에서 중얼중얼 기도하곤 하셨다. 구역장 직분을 맡고나서는..

기고/양화진 2015.09.30

삶의 이정표가 되었던 책

버들꽃나루사람들 2014년 11월호 원고 삶의 이정표가 되었던 책 나에게 좋은 것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이 꼭 좋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간청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책을 잘 추천하지 않는 편이다. 나에게 있어서 책을 추천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내면과 됨됨이와 세계관을 고스란히 열어 보여주는 것과 같다. 내 신앙 여정에 작은 이정표가 됐던 책들이 진리의 길을 찾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희망하며, 책 몇 권을 추천해 본다. 이현주, (생활성서사)이 책은 성경 읽기의 발상을 전복시킨다. 그가 소개하는 예수는 긴 금발머리와 조각 같은 외모에 카리스마 작렬하는 미남 영화배우와 거리가 멀다.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 의해 매끈하게 다듬어진 메시야 예수도 아니다. 저자는 시공간을 초월하..

기고/양화진 2015.09.30

아 어렵다! 정직

100통 2015년 10월 아, 어렵다! 정직 오늘 하루 정직해지기로 마음먹어 봅니다. 몇 시간이나 됐을까요? 결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 언사를 곰곰이 되새겨보니 그 몇 마디 문장 속에 거짓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한 과거의 일을 옮기면서 나를 과대 포장하고 싶은 ‘과장’이 발생합니다. 내가 한 일을 지적하는 상대방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다가 은근히 내 잘못을 감추는 ‘축소’가 발생합니다. 남이 한 말을 마치 내가 한 것인 양 ‘도용’도 서슴치 않고,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칭찬할 때 침묵으로 타인이 받아야 할 칭찬을 ‘도둑질’합니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정직하기로 한 결심이 무너집니다. 내 입으로 쏟아내는 말마다 ‘거짓’이 묻어 있습니다. ‘아니,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고 인정..

기고/양화진 2015.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