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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 21] 그 사람을 가졌는가

신의피리 2024. 4. 21. 19:00

2017년 여름이었다. 병원심방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환우를 위해 기도할 때면 늘 시편 23편을 먼저 외우며 기도하곤 했다. 시편 23편이 환우들에게 큰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편을 수백 번도 더 암송했기 때문에 ‘여호와는~’ 하고 시작하면 막힘 없이 끝까지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2절을 암송하고 3절로 넘어가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된 것이다. 그날 저녁부터 불안증세가 시작됐다. 다음날 아침 일어났는데 여전히 불안감이 엄습했다. 교회를 가면 좀 나아지려니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런 증세가 수요일까지 계속됐다. 다음날에도 사라지지 않으면 병원에 가려 했다. 감사하게도 수요일 밤 음악치료사인 아내가 눈물로 기도해 주고 사랑으로 찬양해 주자 그날 밤부터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내겐 그 일이 너무 큰 충격이었다. 남 일로만 알았던 공황증세가 나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마침 다음주가 여름휴가여서, 주일 설교를 외부 강사에게 맡기고 가족들과 제주에 내려왔다. 불안증세의 여진이 남아 있는 듯했다. 사려니숲 방향으로 운전하던 중 아내가 동물원의 노래들을 틀었다. 친구들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10대 말부터 20대 초중반까지 친구들과 이 노래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일로 바쁘다고 오랫동안 친구들 만남을 놓치곤 했다. 그런데 내가 아프니까 이제서야 친구들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인천, 일산, 강동구에 사는 친구들이 내 호출을 받고 바쁜 와중에 서울 영등포에서 만났다. 그날 우리는 이제 더 자주 만나자고 약속했다. 은퇴하면 한동네로 모이자고도 누군가 말했다. 스페인으로 환갑여행을 가기 위해 적금도 시작했다. 몸이 서서히 망가지니까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어졌는데, 친구만 한 이가 없었다. 

그 후 주로 내 빈 시간을 활용해서 친구들을 계절에 한번씩은 만났다. 그러다 2년 여 전, 친구 종진이가 쓰러졌다. 회사를 퇴직하고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친구에게 다같이 병문안을 갔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 후 월요일 쉬는 날이 되면 친구 만나러 하남에 가곤 했다. 그 어간에 만난 횟수가 지난 이십여 년 만난 횟수보다 더 많은 것 같았다. 더 늦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을 때 만나고 싶었다. 당일치기 여행도 하고, 1박 2일 여행도 했다. 내 안식월 제주생활에 맞춰 좀 회복이 된 종진이 위로 겸 다같이 제주에서 삼 일간 함께 지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함께 걸었다. 둘이 걷고 셋이 걷고 넷이 걸었다. 둘이 찍고 셋이 찍고 넷이 찍었다. 둘이 대화하고 셋이 대화하고 넷이 대화했다. 넷이 꼭 함께 먹었다. 누군가 고민을 털어놓고 누군가 참 적절한 격려를 했다. 누군가 이견을 드러내자 서로 헤아림 없이 격론을 벌였고, 항변을 했고, 금세 미안하다 하고, 오해였다 말했고, 또 금세 하하하하 웃었다. 말하는 수준은 다들 높아졌고, 배려의 수준은 다들 깊어졌지만, 함께 손짓 몸짓 해가며 하던 격론의 패턴은 30년전과 똑같은 것을 보고 실소가 나왔다. 우리는 변한 것일까, 그대로인 것일까. 변했다면 무엇이 얼마나 어떤 방향으로 변했을까,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좋은 것인가, 고집스럽게 여전히 어린것인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대화가 좋았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7년 전 사려니숲으로 가면서 친구들 생각을 했는데, 7년이 지나 그 때 생각했던 그 친구들과 함께 사려니숲을 걸은 것이다. 수영이가 내내 운전하고 신구가 디제이가 되어 멋진 음악들을 들려줬다.


그제 비오는 날 추사김정희유배기념관에 들렸다. 눈에 띄는 현판이 있었다. 추가 김정희가 대정향교 학생들의 공부방 현판으로 쓴 글자요 이름이다. 

疑問堂 : 의문당 : 의심나는 것을 묻는 집


두려움 없이, 셈법 없이 서로에 대해서 '의심 나는 것을 묻는 집', 의문당이 바로 3일간 우리들의 대화였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김녕해수욕장에서 마지막으로 사진을 즐겁게 찍던 도중, 바다와 현무암이 만나는 끝지점에서 종진이가 넘어졌다. 서둘러 데리고 나왔다. 약국을 찾았지만 문을 닫았고, 응급으로 편의점에서 마데카솔과 밴드를 사서 다친 데를 치료했다. 다행히 찰과상만 입었다. 많이 좋아졌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몸이 균형을 잃었을 때 반응이 더뎠던 것이다. 다들 걱정이 앞선다. 

 

세 친구와 헤어진다. 그들은 집으로 가야 하고 다음날 출근해야 한다. 가장 늦은 비행기를 끊었다. 나는 제주버스터널에서 버스를 탔다. 친구의 정의는 무엇인가. 얼마나 친해야 친구일까. 종진, 수영, 신구는 내 친구(親舊)다. 몇 년 전 딸 채윤이가 쉬는 날에도 집에만 콕 처박혀 있는 아빠한테 이렇게 말했다. "아빠! 아빠는 친구 없어? 친구 좀 만나!" 나 친구 있어. '수영이 종진이 신구는 내 친구야.' 친구인데 그동안 많이 못 만났다. 자고로 친구란 자주 만나야 한다. 나이 들어갈수록 더더욱 자주 만나야 좋다. 

 

함석헌 선생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다시 꺼내 읽는다. 그 기준에 아주 조금 더 근접해졌을까.

 


그 사람을 가졌는가

 

_ 함석헌

만 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내내 디제이 역할을 한 신구에게 우리에게 들려줬던 음악들 제목을 알려달라 했더니, 이렇게 알려줬다. 3일간 우리가 들었던 음악들이다. 

 

1. 디어클라우드(얼음요새)
사랑하기 때문에 안되는 줄 알면서도 차가운 얼음요새를 향해 걷는 이야기는 종필이가 말한 찬란한 슬픔을 닮았지. 우리가 살아온 삶의 어느 순간, 어느 시절에서도 느껴지는...
 
2. 야연OST
영화 ‘야연’의 엔딩에 흐르던 애절한 목소리를 기억하는지. 왕이 되었지만 고독하게 살다 죽은 장쯔이. 욕망이란 무엇일까? 불안장애 이신구가 ‘인정의 욕구’로부터 자유롭기를 희망하게 되는 노래

3. 합창4악장(베를린필)
제사가 폭력적 인신제사가 될 수도 있지만 평화적 축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한 곡.
사랑이 한일이라는 결론도 중요한 만큼 인간과 함께 평화를 만들어가고자한 현재도 진행중인 신(神)의 역사와 더불어 우리의 삶도 다음 기회에는 좀 더 나눌 수 있기를
 
4. 모짜르트 협주곡 2악장(아웃 오브 아프리카OST)
안개사이로 샤려니 숲을 맞이하는 모짜르트의 클라리넷은 마치 그 순간을 위한 것 같았지.
종필이가 말한 죽음을 맞이했던 어느 교우의 꺼져가는 그러나 거칠지 않은 숨소리 처럼 들리는...
 
5. on earth as it is heaven(엔니오 모리꼬네)
아름다운 너무도 아름다운 곡인데 폭포에서 십자가에 메달린 선교사가 떨어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 미션. 제목에서처럼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천상의 합창.
 
6. rain(사카모토 류이치)
비를 몰고다니는 그래서 종진이가 좋아하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rain. 어둡지만 묘하게 희망적인 음악처럼 종진이의 건강도 인생도 희망으로 찬란하게~
 
7. 필라델피아(닐영)
동성애자였던 톰 행크스의 평범한 어린시절을 보여주며 차이가 결코 폭력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영화의 엔딩. 차별은 부정하고 차이는 인정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닐영은 늘영(young)하지.
 
8. 검정치마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가끔 들어야하는 노래


9. Long goodbye(카멜)

 불륜영화 주제곡

 

10. 샤콘느 비탈리(Sara Jang)

비극적 카타르시스의 정수

 

11. I remember you(스키드로)

보컬이 젊은 시절 조수영처럼 꽃미남이었는데 지금은 조수영처럼...

 

12. 다시 사랑할꺼야(블렉신드롬)

인천 헤비메탈의 자존심

 

13. coloful(자코모광고음악)

드라이브할때 좋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