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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 22] 나는 아빠다

신의피리 2024. 4. 22. 21:40

친구들이 돌아가고 다시 한주의 첫날을 맞았다. 지난번 아내가 돌아갔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여파가 있다. 날씨도 흐리고 몸의 상태도 썩 좋지 않다. 어디 가고 싶은 데도 없다. 종일 숙소에서 읽다 소파에 누어 졸기를 반복한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닷바람이 차다. 또다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스무 살 대학 1학년 시절이 떠오른다. 그 나이는 불안이라는 나이였다. 그냥 하루를 사는 그 자체가 불안이었다. 하루를 잘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무의미를 숙고했다.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오네시모라는 종은 원래 '무익한'이란 뜻이었는데, 그가 바울을 통해 예수를 만나고 유익한 사람이 되었단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때 만난 복음송가가 있다. 내가 아는 국내 복음송가 중에 가장 좋은 가사였다. 

 

빛이 없어도

- 이인숙 작사, 김석균 작곡

 

1절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이 들려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2절

나는 없어도 당신이 곁에 계시면

나는 언제나 있습니다

나는 있어도 당신이 곁에 없으면

나는 언제나 없습니다

 

후렴

당신이 있으므로 나도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묾으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


 

'꽃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그랬다. 하루라는 주어진 시간이 나는 무의미했고, 그 어디에서도 나는 무익했고, 내 삶에 향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50대가 되어도 20대 초반에 느꼈던 그 감정을 다시 고스란히 느끼다니... 노인이 되어서도 그런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노래를 부른다. 

 

나는 없어도 당신이 곁에 계시면

나는 언제나 있습니다

 

내내 몸이 안좋은 아내가 링거를 맞았다. 나랑 오래 떨어져 있어서 몸이 아픈 게 분명하다. 나도 누워 있다 하니 나가서 좀 걸으라고 거듭 말한다. 전문 용어로 이를 '잔소리'라 하지만, 전혀 잔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잔소리로 한 말도 아니다. 진심으로 아끼며 하는 말이다. 실은 평소에도 늘 그랬을 것이다. '싫어, 오늘은 그냥 하루 종일 집콕 할 거야!' 당당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으나 내 몸은 양말을 신고 있다. 해지기 1시간 전이다. 해질 때까지라도 걷는다. 사상가 김영민 교수는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허무할 때 자신은 항상 걷는다고 했(던 것 같)다. 걷기가 구원이고 해방일 수 있다고 또 다른 철학자 김영민 교수가 「보행」이라는 책에서 오래 전에 말했던 것 같다. 그들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 아니다. 허무할 때, 불안할 때, 지쳤을 때, 수치를 느낄 때, 후회될 때, 그냥 걷는다. 아니 필사적으로 걷는다. 내게 걷기는 현상학적인 기도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판단하지 않고, 그 무슨 생각도 감정도 거절하지 않고 오면 오는 대로 다 그대로 받아준다. 할 수 있는 한 그 모든 사건과 개념, 이미지와 감정을 다 하나님께 아뢴다. 조잘거리며 아뢴다. 그리고 순간순간 말과 생각을 멈추고 침묵을 유지한다. 걸으러 나가기까지는 힘들지만 일단 걷기의 추진력을 얻으면 그땐 치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걷다 뛴다. 뛰어봤자 500미터도 못뛰지만 그래도 함 뛴다. 바다로 간다. 하루 종일 먹구름이었는데 멀리 비양도 주변 하늘이 파랗게 보인다. 

비양도

판포 바닷가 마을 산책(散策)으로 시작해서 금등리 내륙 마을 산책으로 이어간다. 이십여 일 걷다 보니 그새 제주 식물들이 친숙해졌다. 

 

길가에 조성된 이 꽃들은 아주 노골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해가 쨍하고 뜨면 활짝 웃어주고, 해가 사라지는 흐린 날이나 밤이 되면 얼굴을 감춘다.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녀석들이다. 그래, 죄다 얼굴을 가린 것을 보니 해도 얼굴을 숨긴 날이다. 

 

멀구슬나무

 

마을에서 제일 자주 보는 나무다. 집집마다 대문 옆에 이 나무들이 있다. 내가 처음 왔을 때는 막 연한 잎들이 돋는 중이었는데 어느새 푸르러졌다. 제주 동쪽 오조리에서는 아주 특이한 집을 봤다. 그 집엔 대문이 없고, 대신 두 그루의 멀구슬나무가 대문 역할을 하고 서 있었다. 

멀구슬나무

 

멀구슬나무 못지 않게 길과 산에 흔하게 보이는 나무가 있는데, 요 녀석도 좀 특이하다. 

 

아랫부분은 짙은 녹색의 잎인데, 윗부분엔 꽃처럼 위장된 잎들이다. 만져보니 아주 부드럽고 연하다. 봄을 맞아 이제 막 올라온 녀석들이다. 보통 나뭇잎들은 가을에 떨어지고, 다음 해 봄에 새순이 돋고 잎이 난다. 그런데 이 녀석은 다르다. 여전히 푸른 잎들이 늙지도 않고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그걸 짓밟고 그 머리 위에 푸른 잎들을 내고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선다. 그리고 5월이 되면 아랫부분의 잎들이 낙엽이 되어 떨어진단다. 5월 낙엽이란다. 안전하게 어린 녀석들이 다 자라는 것을 밑에서 온 힘 다해 받쳐주는 우리 부모세대가 연상됐다. 

 

어느새 금등리 마을길이 애정하는 산책로가 됐다. 로즈마리의 향기가 코를 찌른다. 다른 밭들은 다 양파 수확이 끝났는데 일손이 부족했나 보다. 수확을 기다리는 녀석들이 열 맞춰 나란히 모여 있다. 내륙의 개나리들처럼 여기저기 유채꽃들이 번져있다. 그 사이 해의 시간이 끝났다. 

 

숙소 가까이 왔다. 멀리 두 유아를 데리고 한 여인이 걷고 있다. 둘째 녀석이 힘이 넘쳐 보인다. 저쪽 모서리에서 마주칠 것 같은 거리다. 나는 세 가족을 무심코 바라본다. 그때 앞서 걷던 녀석이 '아빠~'하고 외친다. 반대편을 봐도 그 아이의 아빠가 보이지 않는다. 뒤편을 돌아봐도 아빠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아이는 서너 번 더 아빠를 외치며 달려온다. 그 뒤로 엄마도 아이를 붙잡으려고 달려온다. 그리고 세 가족과 내가 길 모퉁에서 만났다. 아이는 가까이에서 나를 보고 얼음처럼 멈췄다. 엄마가 환히 웃는다. 이제야 알았다. 아이는 나를 자기 아빠라고 착각한 것이다. 나를 보고 아빠라고 외치며 달려오다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 멈춘 것이다. 아이를 보고 손을 흔들어줬다. 엄마가 아이에게 웃으며 너도 손 흔들라고 해도 아이는 차렷 자세다. 아이에게 손을 여러 번 흔들어주다 뒤돌아선다. 우리 아들, 우리 딸, 채윤이 현승이가 저만큼 어렸을 때도 그랬다. 내가 퇴근하면 아이들은 온 동네 다 들릴 것 같은 목소리로 '아빠' 하며 달려와 안겼다. 이젠 그러지 않는다. 퇴근하면 대개 자기 방에서 각자 자기 일에 몰입 중이다. 그러다가 내가 온 것을 알면 씩~ 웃으며 인사한다. 나 김종필은 김채윤, 김현승 두 젊은이의 아빠다. 언제까지나 아빠다. 불안감은 사라졌다. 역시 걷기는 치유다. 아이의 웃음도 치유다. 우리 가족들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