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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28] 주의 은혜 사슬 되사

신의피리 2024. 4. 28. 19:57

벌써 마지막 밤이다. 오늘 자고 내일 일어나면 아침 일찍 공항으로 출발한다. 집에 갈 시간이다. 창밖으로 제주 바다가 보인다. 오랫동안 이 장면은 하나의 그림이 돼서 내 마음 미술관에 오래 걸릴 것이다. 

늘랑비 301호에서 바라본 제주 저녁바다

 
한라산 등반 여파가 있다. 밤 잠을 설쳤다. 그 어느 때보다 일찍 일어났다. 미지근한 물 한 컵 마신다. 보이차를 내린다. 큐티를 한다. 블로그에 올린다. 그래놀라를 우유에 타서 먹는다. 씻는다. 독서를 한다. 오늘은 주일이라 교회에 가야 한다. 어제 공항에서 렌트를 했기 때문에 오늘은 걷지 않는다. 다리에 알이 배겨 걷지 못한다. 걸어서 1시간 10여분 가는 시골길을 차로 10분 만에 간다. 조수교회 주차장부터 예배당 입구까지 한 대여섯 분이 인사를 하신다. 입구에 그 권사님이 계신다. "아직 안가셨군요." "네.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이성실 목사님의 목소리는 정말 듣기 좋다. 경건한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목소리다. 찬송가를 부른다.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다. 힘차게 부르고 싶은데 힘이 부족하다. 오히려 내 옆에 계신 70대 중반의 남자 분의 목소리가 나보다 더 크다. 

3절.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되네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갑자기 목이 멘다. 주의 은혜의 사슬에 매인 인생이다. 그런 인생을 오십 넘게 살았다. 사슬처럼 매여 있어서 때론 버겁고 불편하다. 벗어던지고 싶을 때도 없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나를 매고 있는 것은 주의 은혜다. 주의 은혜다. 주 예수님의 은혜다. 나를 맨 것은 주의 은혜다. 내가 여기와 있는 것도 주의 은혜다. 내 남은 생애도 은혜다. 은혜가 내 생애를 만들었고, 또 남은 생애를 만들 것이다. 주님께서 찬송을 통해 내 마음을 만져주신다. 
 
내 영혼이 초라해졌다. 비루한 영혼이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가득 차 있다.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은밀하게 약동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는, 나의 전부가 아니다. 최대한 내 마음 숨김없이 정직하게 드러내려 했으나, 그건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다. 은혜 아니면 설교자로 설 수 없다. 은혜 아니면 나는 강단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내 초라한 영혼은 주로부터 도망간다. 멀찍이 따르는 은밀한 제자로 남고 싶다.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도망가고 싶었고 도망 중이라 여겼으나, 여전히 나는 주님의 손바닥 위에 있다. 내가 땅끝에 이르고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주님은 거기 계신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웅얼거리기도 전인 내 혀의 말과 생각을 그분이 아신다. 그리하여 결국 내 기도는 결어를 맺는다. 
 
나를 주께 매소서
 
나를 도망가지 못하게 매소서. 내 육신이 널뛰는 자아의 탈출을 좇지 않게 하소서. 부디 나를 은혜의 줄로 매소서. 
 
슬픔이 영혼에 차오른다. 주의 은혜는 찬란하나 내 영혼은 초라하다. 나의 빈 잔을 채우소서. 
 
교인들 틈에 섞여 밥을 먹는다. 목사라고 극진히 대접해 준다. 대접받는 것이 익숙하지 못해 마음속으로 안절부절못한다. 우리 교회 같았으면 벌떡 일어나 내 밥그릇 가져와 먹고 또 다 먹은 그릇 가져다 둘텐데, 여기 성도님들의 섬김이 빛의 속도처럼 빠르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나온다. 오늘은 더이상 걷기 싫다. 걸을 힘도 없다. 맛있는 커피가 그립다. '하소로커피'로 간다. 

하소로커피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일부러 차귀도 앞바다에서 시작하는 해안도로로 잡았다. 생이기정은 그리운 장소다. 해 질 녘의 풍경은 아름답다. 처음엔 홀로 와서 걸었다. 그 후엔 사랑하는 아내와 와서 걸었다. 또 친구들을 데려왔고, 마지막엔 교회 형제 두 분을 데려왔다. 이젠 마지막이다. "안녕! 차귀도!" 
 
캐리어를 꺼내 짐을 싼다. 재활용쓰레기와 음식물쓰레기를 금등리마을회관 앞 분리수거하는 곳에 가져다 버린다. '카페온결' 문을 닫을 시간이다. 마지막 저녁식사는 여기 수프로 한다. 예의다. 그러고 싶다. 그래야 할 것 같다. 스테이늘랑/카페온결 매니저님께서 서비스로 주신다는 걸 극구 사양하고 결재를 했다. 

카페온결 저녁식사

 
후루룩 식사를 마무리한다. 흡족한 식사다.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매니저 님이 선물을 주신다. 카페온결에서 판매하는 귤잼이다. 지난번에도 작은 걸 주셔서 숙소에서 과자에 발라 맛있게 먹었는데, 마지막 작별 인사로 큼직한 걸 주셨다. 여러모로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감사했다. 어제 아내의 책 두 권을 선물로 드렸다. <커피 한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 <나의 성소 싱크대 앞> . 작가인 아내의 책은 선물하기 좋은 책들이다. 선물을 받으면 감사해서 나도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피장파장 계산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진정으로 감사해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건 아주 다른 것이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한다.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카페온결 귤잼

 
한 달이 너무 빨리 갔다. 화살 날아가듯 날아갔다. 시간을 더 늘릴 수가 없다. 안식을 더 연장시킬 수가 없다. 그냥 하루하루 살기만 했지, 내 미래를 조금도 대비하지 못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한 달동안 '현재'에만 충실했다. 그 모든 현재들이 지금 시점에선 다 과거가 됐다. 그러나 지금 현존하는 내 존재 안에는 모든 과거가 다 현재로 살아있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내 존재 안에서 내 모든 미래도 다 현재가 될 수 있을까. 아직 그것만큼은 잘 모르겠다. 거기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