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0일에 <달라스 윌라드> 전기가 출간되었다. 코로나 기간이었다. 곧장 구입했다. 6월 19일에 이 책을 읽었다. 2021년 12월에 두 번째로 읽었다. 2022년 8월에 다시 읽었고, 이번 2024년 8월 여름휴가를 맞아 네 번째 읽었다. 전기를 거의 해마다 읽은 것은 달라스 위라드가 유일하다.
나는 '영혼'을 잃을 뻔했다. 2020년 경이었다. 그때 달라스 윌라드가 책을 통해 내게 말해줬다. "너는 목사로서 지금 여기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아직도 모르느냐?" 예수님이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 시대 목사들에게 적용한 말을 다시 내게 적용한 것이다. 나는 정직하게 성찰했다. 지금 내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실체와 능력에 대해서 나는 하나도 아는 바가 없었다. 내 영혼은 거의 질식 수준이었다. 그때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며 그 나라의 실재를 전 삶으로 보여준 달라스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하마터면 영혼을 잃을 뻔했다.
그날로부터 달라스 윌라드를 제대로 다시 읽었다. 그의 이름으로 번역된 모든 책을 다 읽었다. 두 번 읽고 세 번 읽은 책들이 수두룩하다. 매일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뜨거워졌다. 확신이 섰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쓰지 않고,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사는 사람으로서 말했기 때문이다.
달라스 윌라드 전기를 다시 읽었다. 분명했다. 나는 달라스 윌라드 파다. 그의 삶에서 내 삶을 보는 것 같았다. 세대주의적 부흥주의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어린 시절, 그러나 하나님 나라 신학과 철학을 통해 지성과 신앙이 확장되던 청년 시절, 고전과 영성을 통해 신앙의 인격적 실천에 주력하며 살아왔던 그의 중년기, 나는 달라스 윌라드의 부분 집합이었다. 어느 한 신학 전통에 매몰되지 않고, 두루 고르고 균형있게 성찰하되,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과 성령님의 실재와 활동에 대한 관심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았다.
리처드 포스터는 서문에서 달라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평생에 한 번 번쩍이는 인간 초신성의 존재를 만날 수 있다. 그 초신성은 우리 정신과 정서의 지평을 가로지르고, 그 빛의 강도는 우리를 영원히 바꾸어 놓는다. 내게는 달라스 윌라드가 그런 초신성이었다.
집요한 의문이 있다. 남다른 해박함과 순수한 선량함은 드문 조합인데 정확히 어떻게 양쪽을 겸비한 인물이 생겨났을까? 해박하면 대개 교만 때문에 망가지고, 선량하면 치열한 지적 노력이 부재하기 일쑤다. 그런데 해박함과 선량함의 이 진기한 조화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24p)
존 오트버그는 후기에서 달라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달라스의 생가가 중대하고 그의 전기를 읽는 것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의 일생 자체가 아주 보기 드물게 하나님을 담는 그릇, 곧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처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401p) ... 그를 만난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흘려보내는 도관이었다. 그가 완벽해서가 아니었다. ... 그런데 우리 대다수와는 달리 하나님의 실재와 임재가 그에게는 눈에 보일 듯 또렷했다. 작은 세포와 신경 연접부에 차원에까지 스며들었다. 그는 도무지 서두를 줄을 몰랐고 험담에는 아예 흥미를 못 느꼈다.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그는 길가까지 전송하며 작별하곤 했는데, 설령 그가 축복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어도 왠지 상대는 자신이 경험한 일이 바로 축복임을 알았다. (404p)
달라스 윌라드는 후설의 전기 현상학을 전공했다. '사태 자체로', '본질직관'이라 언표된 철학이 자신의 신앙을 지식과 논리로 설명해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실재론을 붙잡았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고수했고, 인식론적 실재론을 회의하지 않았다. 그 연장선에서 도덕적 실재론을 붙잡으며 도덕 지식의 실종에 마음 아파했다. 그의 철학은 신학에 종사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그것은 실재한다. 예수의 복음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고, 동시에 예수는 그 나라에 우리를 초대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가 살 수 있다.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갈망하고, 꾸준히 훈련에 임할 때 우리는 더 자주, 더 깊이, 여기 임한 하나님 나라의 임재 안에서 그 나라의 능력과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며 살 수 있다. 그는 그렇게 살았고, 추구했고, 보여줬다. 그의 열정에 나도 전염이 됐다. 그만큼 살아내지는 못하겠지만, 나도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원한 삶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누리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내가 섬기는 이 모든 목회 사역에 그 나라의 실재를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