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책에서 만난 문장 57

<영적 가면을 벗어라>, 래리 크랩

지금의 나를 나되게 만드는 데 영향을 끼친 책 10권을 꼽으라고 하면, 그중의 하나가 래리 크랩의 일 것이다. 대학 졸업할 즈음에 초판을 읽었고, 목회자가 되어 청년들을 지도할 때 재판을 읽었다. 두 번째 읽고 나서는 몇몇 청년들을 데리고 북스터디도 했었는데, 원성이 자자했다. 삶이 힘든데 이렇게까지 힘든 책을 읽어야 되겠느냐, 이렇게 힘들게 하는 책을 목회자가 추천해도 되느냐는 원성이었다.  그 사이에 래리 크랩의 책들은 계속 출간되었다. 나는 한 두권을 더 읽었으나 다는 읽지 못했다. 목회자의 필독서들을 읽느라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책이 나오는 족족 책을 읽었다. 아니 거의 뜯어먹는 수준이었다. 읽고 소화를 했고, 점점 래리 크랩화 되었다. 오래전 만든 블로그 이름은 래리 크랩의..

<존 스토트의 설교>, 존 스토트

3개월 안식을 마치고, 다시 목회 현장으로 복귀했다. 주일 설교를 준비하려 하니 힘이 든다. 내내 편히 놀고 쉬다가 다시 온 존재를 쥐어짜듯이 초 집중해야 하는 설교 준비로 모드 전환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내가 그동안 이걸 어떻게 해왔던 것일까.  마중불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내 목회 스승이신 존 목사님 앞으로 가는 수밖에.  를 다시 읽는다. 한 3분의 2를 밑줄 친 것 같다. 죄다 암송하면 좋겠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게 아쉽다. 3일에 걸쳐 책을 읽고 나니, 영혼에 작은 불 하나가 켜진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자. 성경에 대한 충실성, 현실세계에 대한 적실성, 말씀과 설교에 대한 명료성, 무엇보다도 하나님도 내 설교를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148p설교문을 작성한 ..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페터 제발트

긴 꿈을 꾼 것 같다. 13일 간 이탈리아와 독일 일부 지역을 다녀왔다. 성베네딕토 수도원 기행이었다. 모든 날, 모든 장소, 모든 상황이 내내 좋았다. 낯선 풍경을 보는 것, 그 풍경 안에서 해가 지고 해가 뜨는 것, 위대한 성인들이 걷고 기도하고 살아냈던 그 땅에 서서 그 마음 품어보는 것, 다른 민족들이 과거에 살아온 삶의 방식과 건축물들을 헤아려 보는 것, 이탈리아와 독일의 시골 마을을 걸어보는 것, 로마네스크-고딕-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중세의 수도원 성당 한 구석에 앉아 기도해 보는 것, 그 모든 것이 좋았다. 내 삶의 속도를 줄이라고 한다. 내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 한다. 내 삶의 경계 세우기를 그만하고 평화롭게 살라 한다.  꿈에서 겪은 것, 느낀 것, 간직한 것들을 내 일상과 현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첫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수많은 행복과 불행의 근거가 되는 주어와 수많은 생의 사연이 담긴 동사가 강력하게 연결됐다. 주어와 동사를 연결 짓는 드러난 사유는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소설에서 별로 주목받지 않는다. 소설은 이 강렬한 첫 문장 이후, 3일간 장례식장을 묘사한다. 죽은 아버지의 유일한 상주인 50대를 맞이한 딸의 시각에서 조문하러 온 손님들을 관찰한 이야기다. 모든 조문객은 아버지의 지인들이다. 작가는 조문객과 아버지의 직간접적인 사연을 하나둘 소개하면서 빨치산 낙인 찍힌 아버지의 인생을 추적한다. 아니 베일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진면목이 하나둘 드러난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

<목회자란 무엇인가>, 케빈 벤후저

우리는 모두 20세기와 21세기의 나쁜 경험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불안 치료제가 넘쳐나며, 불안의 유형 또한 그러하다. 미국인의 40퍼센트가 불안 장애로 고통당하고 있으며, 항우울제나 항불안제(예를 들면, 프로작, 팍실, 졸로푸트)를 처방받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약으로 얻은 평정은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겔 13:10)과 다름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이데거가 불안이라고 불렀던 것과 가장 근접한 의학 용어는 아마도 범불안장애(generalized anxiety disorder)일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거미나 대중 연설처럼 구체적 대상에 대한 두려움인 공포증과 달리) 불안을 촉발하는 특별한 자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안이란 절망의 경계에 서 있는 영적 상황이며, 구체적인 느낌이라..

<默想>, 승효상, 여행의 기술

5월에 두 주간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길에 오른다. 아내는 혼자서라도 가겠다는 결기를 보여줬고, 결국 나도 따르기로 했다. 애초에 '베네딕토'에게도, '수도원'에게도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3개월 안식월을 제대로 보내려니 마땅한 계획이 잘 세워지지 않는다. 4월엔 홀로 제주살이를 하기로 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고독과 침묵을 친구 삼아보려는 마음인데, 어쩌면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와 접점이 있을지 모르겠다 싶었다. 가기로 결정하니 홀가분해졌다. 그러나 나는 베네딕토에 대해서도 모르고, 수도원에 대해서도 모른다. 신학교 시절 교회사 공부를 할 때 중세 1,500년은 한 10여분 만에 건너뛰었고, 내겐 관심 밖이었다. 초대교회에서 곧바로 종교개혁시대로 건너가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곧바로 리서치에..

<영성의 깊은 샘>, 제럴드 싯처, '아케디아'에 관하여

"그러므로 기도와 노동의 일과에 안주할 때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유혹이 '아케디아'(acedia)라는 것은 놀랍지 않다. 아케디아는 쉽게 번역하기 힘든 헬라어 단어로 1,600년 전에 에바그리우스가 수도자들에게 지적했던 것이다. "나태"는 게으름을 뜻하므로 옳지 않은데, 이는 아케디아의 의미라기보다는 결과다. 아케디아는 권태, 불안, 부주의로 정의하는 것이 좋다. 일과로 인해 우리는 성급해질 수 있다. 그래서 신앙 성숙과 삶의 풍성한 수확에 이르는 더 쉽고 빠른 길이 있기를 바란다. 또 지름길을 택하기 원한다. 그래서 도중에 즐거운 일을 찾고, 빠르게 발전하는 과정이 눈앞에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단조로움과 지루함에 싫증 나기 충분할 정도로 오랫동안 기도와 노동의 일과를 따를 때, 수도원에서 '..

<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제주 도착 다음날부터 비가 왔다. 신창리에 있는 무명서점에 갔다가 그냥 나오기 민망해서 아무 책이나 골랐다. 소설을 읽고 싶었는데 얇았다. 저자가 누군지 몰랐는데 202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다. 아침 그리고 저녁마다 감상에 젖곤 했는데 제목이 좋았다. 그래서 골랐다. 언듯 보면 이유 없어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다 이유는 있다. 어제 오후에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오늘 오전에 다 읽었다. 주인공 요하네스가 태어나던 순간, 그의 아버지의 시선은 그 탄생 순간에 머물러 있다. 그것이 '아침'이다. 이야기는 곧장 태어난 아기 요하네스의 죽음의 순간으로 이동한다.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는 요하네스가 죽음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다. 마침내 주인공은 자신의 죽음을 깨닫고 받아들인다. 먼저 죽은 친구 페테르가 요..

<사막의 지혜>, 로완 윌리암스,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훈련

한 형제가 압바 포이멘에게 물었다. "어째서 제가 원로들에게 제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겁니까?" 원로가 대답했다. "압바 요한 콜로부스가 말하기를 '원수는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가장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본받아 따르는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원로 앞에 무방비 상태가 되는 법을 익힘으로써 수도사는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사막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훈련의 책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로완 윌리암스, 90-91. '원수는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가장 기뻐한다' '하느님을 본받아 따르는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원로 앞에 무방비 상태가 되는 법을 익히는 것이 모든 훈련의 핵심이다.'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드러내려면 연약한 자신을 공개적으로 인정..

<온유한 증인>, 달라스 윌라드, 지옥은 왜 있는가

지옥 비슷한 것을 경험했다. 그곳은 바로 강대상 위에서였다. 말씀을 전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죄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가 마구 떠오르는데, 입으로는 천국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도망갈 수도 없다.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비치는 곳에 죄인이 서 있다. 숨을 수도 없다. 영혼이 뜨거워진다. 입이 바싹 마른다. 여긴 천국인가 지옥인가. 하나님의 사랑의 눈은 어느새 죄인의 마음엔 진노의 눈으로 보인다. 강렬한 사랑의 빛 안에 머물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는 이 곳은 지옥의 한 켠이다. **** * 달라스 윌라드, , 75p. 지옥은 왜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분과 최대한 멀리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