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기고 139

지금 여기, 주어진 작은 일에서 행복하기

21교구 소식지 5호. 2015/10/25 지금 여기, 주어진 작은 일에서 행복하기 교구소식지 칼럼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다. 딱 마음에 드는 주제가 안 생긴다. 흰 백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떠오르는 단어들을 썼다 지웠다 하기가 벌써 한 시간째다. 조급함의 바람이 불고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괜한 일 했나보다 하는 후회와 글쓰기 실력의 열패감 때문에 잠시 낙담한다.글쓰기를 중단하고 시선을 돌린다. 이디오피아 예가체프 커피 한 잔을 찬찬히 내리니 고소한 향기가 번져가는 게 보인다. 글렌 굴드가 1955년도에 연주한 바흐(Bach)의 Goldberg Variations을 들으니 번민이 일거에 사라진다. 그리고 하얀 백지 위에 내 마음을 살며시 포개 얹어본다. 주님과 응접실에서 마주 앉은 느낌이다. “..

기고/양화진 2015.10.18

요셉은 우리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까?

21교구 소식지 3호. 2015/10/04 요셉은 우리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까? 20대 시절, 불현 듯 의문이 생겼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랑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너무 믿음이 좋았고, 너무 영웅적이고, 너무 영화적이었다. 나는 의심도 많고, 근심걱정도 많고, 분노할 때도 종종 있는데, 성경 인물들은 죄다 영적 거장들이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거물들이었다. 특히 요셉이 그랬다. 요셉은 17살 때 배다른 형제들의 질투 때문에 이집트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됐다. 이집트 경호대장 보디발의 가정총무가 되어 금세 인정받았지만, 이내 주인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결과 강간미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흔들리지 않았다. 남 탓하지도 않았다.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았다..

기고/양화진 2015.09.30

권찰(勸察)

21교구 소식지 2호. 2015/09/20 권찰(勸察)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청년부 소그룹 이름이 ‘구역’인 것도 조금 촌스러웠는데, 구역장을 도와 구역을 섬기는 청년 리더를 가리켜 ‘권찰’이라 부르니 말이다. 사전을 찾아봤다. 권 : 勸 권할 권 / 찰 : 察 살필 찰권찰 : [기독] 장로교에서, 신자의 가정 형편을 살피고 찾아가서 만나 보는 직무. 또는 그 일을 하는 사람. 곰곰이 뜻을 음미하다 보니 한 사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우리 어머님이다. 어머님께서 권찰이라는 직분을 섬겼던 내 어린 시절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구역 식구들 집을 자주 들락거리셨다. 혼자 계시는 어르신에게 쌀을 갖다 드리기도 하고, 누구 누가 아프다 하면 늦은 밤 홀로 부엌에서 중얼중얼 기도하곤 하셨다. 구역장 직분을 맡고나서는..

기고/양화진 2015.09.30

삶의 이정표가 되었던 책

버들꽃나루사람들 2014년 11월호 원고 삶의 이정표가 되었던 책 나에게 좋은 것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이 꼭 좋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간청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책을 잘 추천하지 않는 편이다. 나에게 있어서 책을 추천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내면과 됨됨이와 세계관을 고스란히 열어 보여주는 것과 같다. 내 신앙 여정에 작은 이정표가 됐던 책들이 진리의 길을 찾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희망하며, 책 몇 권을 추천해 본다. 이현주, (생활성서사)이 책은 성경 읽기의 발상을 전복시킨다. 그가 소개하는 예수는 긴 금발머리와 조각 같은 외모에 카리스마 작렬하는 미남 영화배우와 거리가 멀다.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 의해 매끈하게 다듬어진 메시야 예수도 아니다. 저자는 시공간을 초월하..

기고/양화진 2015.09.30

아 어렵다! 정직

100통 2015년 10월 아, 어렵다! 정직 오늘 하루 정직해지기로 마음먹어 봅니다. 몇 시간이나 됐을까요? 결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 언사를 곰곰이 되새겨보니 그 몇 마디 문장 속에 거짓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한 과거의 일을 옮기면서 나를 과대 포장하고 싶은 ‘과장’이 발생합니다. 내가 한 일을 지적하는 상대방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다가 은근히 내 잘못을 감추는 ‘축소’가 발생합니다. 남이 한 말을 마치 내가 한 것인 양 ‘도용’도 서슴치 않고,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칭찬할 때 침묵으로 타인이 받아야 할 칭찬을 ‘도둑질’합니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정직하기로 한 결심이 무너집니다. 내 입으로 쏟아내는 말마다 ‘거짓’이 묻어 있습니다. ‘아니,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고 인정..

기고/양화진 2015.09.30

있는 모습 그대로

21교구 소식지 1호. 2015/09/13 있는 모습 그대로 내 나이 마흔넷이다. 우리나라 남성의 현재 기대수명이 78.5세(2014년 12월발표)라고 하니 반환점을 돈 셈이다. 요샌 죽는 게 그다지 두렵지가 않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더 짧아져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 마흔 즈음부터 세월의 속도가 제트엔진을 단 듯하다. 1년이 짧게 느껴지니 말이다. 그런데 시간의 속도와 성숙의 속도는 반례비하나 보다. 성장의 대한 마음의 몸부림보다 안주에 대한 몸의 욕구가 더 커졌다. 20대 때 쓴 일기, 30대 때 쓴 설교문을 간혹 다시 읽어보면 놀라움의 연속이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깊고 넓다. 굳이 내 글을 봐서만이 아니다. 20대 청년들과 대화하다보면 그냥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 같은 ..

기고/양화진 2015.09.13

포옹과 키스 사이

100통 2014년 4월호 포옹과 키스 사이 청년들을 대상으로 데이트와 결혼에 대해서 강의를 할 때가 있습니다. 대체로 연애강의는 호응이 좋은 편입니다. 모든 청춘남녀의 초미의 관심사라 그렇겠지요! 그런데 강의 도중 한순간 공기의 흐름이 확 뒤바뀌는 것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십중팔구, 그 주제는 스킨십! ‘스킨십’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이 단어는 엄청난 파동을 일으켜 청중들의 동공을 최대 사이즈로 확대시키고, 잠자며 놀던 체세포들을 일시에 깨워 활성화 시키는 놀라운 단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키스 해보셨나요?’ (입술을 슬쩍 움직이는 여러분들의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결혼 전에 키도 해도 되는 걸까요?’ (중세시대 사제들이나 할 법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

기고/양화진 2015.09.07

작별 인사

아직 두어 주가 더 남았지만, 서둘러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이 제가 마지막으로 설교하는 날인 까닭에, 굳이 다른 이야기하기가 어색했기에 그렇습니다. 마지막 설교라 생각하니, 목이 멥니다. 사임을 결정하기에 앞서 병든 사람처럼 고뇌는 깊고, 마음은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떠남의 명령이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처럼 반복해서 제 귓가에 맴도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말씀 진정 하나님 뜻인지 많은 날 씨름하듯 기도한 끝에, 고향과 다름없는 15년간 섬겼던 사랑하는 한영공동체를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목자들에게 그 결정 이야기하던 날은 제 생에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단풍이 절정에 다다르고, 이어 낙엽이 쓸쓸이 지는 계절이 시작될 때면, 더 이상 여러..

기고/TNT 2015.05.29

꽃 한 다발의 행복

지난 목요일 저녁 퇴근길에 ‘소국’ 한 다발을 사서 집에 들어갔습니다. 기념일? 아닙니다. 생일? 역시 아닙니다. 그냥이었습니다! 아마도 결혼 12년 만에 처음 해본 어색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 그런데 결과는 생각 그 이상으로 훨씬 좋았습니다. 아내는 연실 꽃을 들고 셀카를 찍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페북 친구들에게 지체없이 이 행복을 자랑합니다. 늦은 밤엔 꽃을 조그만 단지 세 갈래로 나눠 꽂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독서를 합니다. 근래에 본 모습 중에 가장 행복해 보였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행복이 가까이 있는데, 왜 이걸 여태 몰랐지?’ 사실 소국을 사들고 간 이유가 있긴 합니다. 지난 월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아내가 지나치는 말로..

기고/TNT 2015.05.29

서른 잔치는 시작됐다 - 82또래들을 위한 찬가!

서른 즈음이 되면 왠지 모를 서글픔과 두려움의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청춘의 끝자락에서 평생 반려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직 비어있기에 외롭고, 지나온 족적의 빈곤함에 서글프고, 여전히 희미한 미래의 내 자화상이 두렵기에, 서른은 위기요 슬픔의 시간입니다. 굳이 김광석의 를 부르지 않아도 서른 그 자체는 누구도 주의를 주고 싶지 않은 인생의 정거장 같습니다. 그래서 서른은 춥고 그림자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서른의 칙칙함을 걷어 차버리고, 싱그러움을 유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82또래들! 저는 82또래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미치는 은근한 영향력이 마음 든든하게 느껴집니다. 그들이 있어서 안정이 됩니다. 그들이 앞장서기에 TNT의 화력이 막강합니다. 그들이 구석구석 사역의 밑바닥을 누비고 있어서 ..

기고/TNT 2015.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