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제주안식월 17

[제주안식17] 삶은 감자다

미세먼지 매우나쁨 초미세먼지 매우나쁨 아침부터 하루종일 미세먼지가 매우나쁜 상태다. 멀리 한라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숙소에 머문다. 읽고 쓰고 눕고 먹는다. 몸이 근질거려서 마스크를 쓰고 나온다. 처음으로 분리수거를 한다. 분리수거장은 금등리 마을회관 앞에 있는데, 걸어서 한 600여 미터 거리다. 할머니 한분이 분리수거를 도와준다. 아마도 활동비 조금 받으면서 일하시는 듯싶다. 이왕 나온 김에 또다시 동네 산책을 잠시 한다. 안 가본 골목길만 찾아서 걷는다. 한 집 돌담 앞에 멈춰서 생각한다. 저런 집에서 남은 인생을 살면 어떨까? 조금 공사를 하고, 마당에 잔디를 깔고, 느리게 아주 느리게 사는 것이다. 지금처럼 읽고 쓰고 걷고 생각하고 기도하며 사는 것이다. 그럼 누가 밥은 먹..

[제주안식16] 어떤 바람

다들 용머리 해안에 꼭 가보라 했다. 마침 모슬포 항에서 식사를 한 김에 산방산 아래 용머리 해안으로 간다. 날씨가 맑다. 바람이 살살 분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개방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걸어가면서 기도한다. "주님, 오늘 같은 날, 제게 선물 한 번 주시는 건 어떠신가요? 용머리 해안길 한 번 가보고 싶어요." 큰 기대를 가고 갔지만 오늘은 개방하지 않는다는 팻말이 걸렸다. 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돌린다. '그렇지. 내가 왜 이런 걸로 기도했을까?' 병자들을 위한 기도,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기도, 자녀들을 위한 기도 등은 잘하건만, 정작 나 자신을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잘 기도하지 않는다. 내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기를 원하고, 그분의 나라와 뜻을 구하며 사는 그 모든 분..

[제주안식15] 고독, 침묵과 친해지기

갑자기 걷는 시간이 많아지니 당장 무릎에 무리가 가나 보다. 무릎 통증이 생겼다. 해서 오늘은 숙소에서 늘어지게 쉰다. 쉴 때는 책을 읽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모처럼 독서량이 많은 오전이다. 아무래도 좁은 숙소에 종일 있으려니 몸이 늘어진다. 몸이 늘어지면 영혼도 탁해지는 것 같다. 불안감이 솔솔 몰려온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있어도 괜찮은 건지 싶다. 잠시 밖에 나가 걷는다. 바다로 나간다. 돌담 사이를 걷는다. 이 마을 저 마을 골목골목을 한량처럼 느릿느릿 걷는다. 느리게 걸을 때는 뒷짐 자세가 최고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손이 뒤로 돌아간다. 느리게 걸으면 자세히 보인다. 새삼 길가에 핀 꽃들과 여기저기에서 지저귀는 새들과 위험한 아스팔트를 가로지르는 벌레들에 눈과 귀가 쏠린다. 눈..

[제주안식13] 좁고 작고 낮은 수준을 받아들이며

낮부터 날씨가 맑아질 예정이다. 구름이 없다. 이제 금악오름에 오를 때가 왔다. 서둘러 버스 시간을 알아 본다. 12시다. 점심은 나가서 먹는다. 두모리사무소 앞에서 785번 간선버스를 탄다. 주말이라 운행 횟수가 적다. 이용객도 적다. 또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이러다 버스회사 문 닫는 거 아닌가. 이렇게 승격이 적으면 적자 날 텐데... 금악리에서 식사를 한다. 백종원 골목식당에 나왔다는 광고 때문인지 인근 3~4개 식당에 손님들이 가득이다. 이제 금악오름을 향해 걷는다. 이효리가 뮤직비디오를 찍어서 유명해졌다고 하나, 아래에서 보니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동네 뒷산 같은 느낌이다. 금악오름에 가까이 다가가자 패러글라이딩이 보인다. 멋있다. 고개를 들고 연신 사진을 찍는다. 공중에서 여성의 비명소리가..

[제주안식12] 수다와 보행

이민재 목사를 만났다. 제주에 살고 있는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 다니던 모교회 1년 후배다. 장신대를 나와 통합측 목사가 됐고, 나는 무늬만 고신 목사가 됐다. 청소년 시절 이후, 한참 세월이 지나 다시 연락이 됐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한 십여 년 전에 제주로 내려왔다. 서귀포 외곽 마을에 터를 잡고 목회를 한다. 한때 동네 주민들의 귤 농사를 내륙으로 연결해 주는 일도 시도해 보았고, 나는 그를 통해 맛있는 귤과 한라봉을 저렴하게 몇 차례 구매한 적도 있다. 그와 내가 있는 곳 중간 쯤인 모슬포항 근방에서 만났다. 나는 한경에서 버스 타고 가고, 그도 서귀포에서 버스 타고 왔다. 참 대화할 맛이 나는 친구다. 그는 나보다 좀 더 진보적이다. 독서량도 많고, 아주 시원~한 욕도 찰지..

[제주안식11] present is present

초대를 받았다. 낄 자리가 아니지만,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니 염치 불고하고 가겠다 했다. 이성실 목사님이 교인 댁으로 심방 가는데 어쩌다가 심방대원이 됐다. 권사님은 원래 안양에서 태어나서 50년 넘게 사셨다 한다. 남편과 제주에 왔다가 애월에서 마당이 있는 180년 된 작은 집과 사랑에 빠졌다. 결국 집을 사서 눌러앉았다. 권사님은 유쾌한 분이다. 먹는 것을 사랑한다.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을 좋아한다. 아직 젊은 듯한데(60대 초중반?) 2년여 전 남편이 암으로 쓰려졌고 먼저 천국에 갔다. 동네 골목 맨 끝자락에 자리한 그 작은 집에서 2년여를 혼자 사셨다고 한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오랫동안 남편과 함께 자던 침대에 눕지를 못하고 작은 방에서 잤다고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제주안식10] 同行

정정조 집사님이 방문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장장 11시간 동안 내게 제주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해 주셨다. 사려니숲을 두어 시간 걷고, 성산일출봉을 조망하며 올레길 2코스 일부 구간을 걸었다. 내가 있는 서쪽과는 또 다른 풍광이고, 좀 더 이국적이다. 오랜만에 섭지코지도 가보고,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하도-월정을 지나 함덕해수욕장까지 왔다. 늘 자동차를 타고 그냥 지나쳤던 구석구석을 정성껏 안내하셨고, 함덕해수욕장 가운데 있는 델문도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했다. 일부러 오셨다. 출장 오셨다가 그냥 가도 되는데, 일부러 하루 시간을 내셔서 오셨다. 내가 차 없이 지내고 있다고 하니, 일부러 제주 동쪽으로 안내하셨다. 반나절만 안내하고 가셔도 괜찮은데, 일부러 저녁까지 동행해주셨다. 일부러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