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11] present is present

신의피리 2024. 4. 11. 22:39

초대를 받았다. 낄 자리가 아니지만,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니 염치 불고하고 가겠다 했다. 이성실 목사님이 교인 댁으로 심방 가는데 어쩌다가 심방대원이 됐다. 권사님은 원래 안양에서 태어나서 50년 넘게 사셨다 한다. 남편과 제주에 왔다가 애월에서 마당이 있는 180년 된 작은 집과 사랑에 빠졌다. 결국 집을 사서 눌러앉았다. 권사님은 유쾌한 분이다. 먹는 것을 사랑한다.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을 좋아한다. 아직 젊은 듯한데(60대 초중반?) 2년여 전 남편이 암으로 쓰려졌고 먼저 천국에 갔다. 동네 골목 맨 끝자락에 자리한 그 작은 집에서 2년여를 혼자 사셨다고 한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오랫동안 남편과 함께 자던 침대에 눕지를 못하고 작은 방에서 잤다고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고 한다. 다행히 딸 같은 젊은 부부가 권사님의 친구가 되었다. 그 부부도 8년 전 서울 생활 때려치우고 제주에 내려와 살고 있는데, 주말마다 권사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그 예쁘고 작은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가 열렸다. 마침 영화배우이자 뮤지컬 배우인 다재다능한 아들이 스쿠터를 타고 서울에서 진도로 내려왔다가 배를 타고 제주에 왔다. 거의 예술가처럼 보이는 아들이 고기를 기가 막히게 구웠다. 

 

한 숟가락 먹고 정신없이 웃었고, 또 한 젓가락 집어 들다가 또 정신없이 웃었다. 그렇게 낮은 밤이 되었고, 웃음꽃이 만발했다. 권사님의 권유로 지은 지 180년 된 집 내부에 들어가 보았다. 정말 작았다. 하루이틀 살아볼 수는 있지만, 오래 살기는 힘들 것 같은 집이다. 수도자의 영성을 갖추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집에서 권사님은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고, 2년 전부터는 혼자 산다. 이제 좀 사람들 더 많이 초대하겠다고 한다. 오늘 하루를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한다. 검소하지만 베풀고 나누며 살고 싶다 한다. 참 잘 하셨다. 그 방법이야말로 홀로 남은 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결정이다. 참 잘했다. 남편이 마지막 숨지기 전에 유언처럼 남긴 말도 그런 것이었다 한다. "함께 즐겁게 살다가 함께 가려고 했는데 그건 못했네. 충분히 놀다가 천천히 와" 빨리 못 가서 몸도 마음도 망가지지 말고, 유언처럼 충분히 놀다가 하루하루를 선물로 여기며 베풀며 살다가, 주님 부르실 때 가시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식사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권사님도 제주에 쉬러 왔다가 마당 예쁜 집과 사랑에 빠져 눌러앉았다. 권사님의 친구 같은 젊은 자매 부부도 바쁜 서울 생활을 접고 용감하게 제주에 내려왔다. 늘랑비 매니저 집사님도 제주에 쉬러 왔다가 하던 일 다 정리하고 여기서 산다. 이성실 목사님 부부도 1년간 제주생활하러 내려왔다가 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알 수 없는 인생들이다. 다들 고민했고 중요한 순간에 선택했다. 좀 더 느리게 여유 있게 인간답게 사는 삶 말이다. 나는 안식년을 맞아 3개월을 쉰다. 그중 두 번째 달을 홀로 제주생활하려고 내려왔다.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서 똑같은 삶을 살게 될까? 그때는 좀 더 일상을 더 잘 살아낼까? 아니면 문이 닫히고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될까? 

애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