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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17] 삶은 감자다

신의피리 2024. 4. 17. 20:41

미세먼지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저지오름과 한라산

 

미세먼지 매우나쁨

초미세먼지 매우나쁨

 

아침부터 하루종일 미세먼지가 매우나쁜 상태다. 멀리 한라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숙소에 머문다. 읽고 쓰고 눕고 먹는다. 몸이 근질거려서 마스크를 쓰고 나온다. 처음으로 분리수거를 한다. 분리수거장은 금등리 마을회관 앞에 있는데, 걸어서 한 600여 미터 거리다. 할머니 한분이 분리수거를 도와준다. 아마도 활동비 조금 받으면서 일하시는 듯싶다. 

금등리마을회관 분리수거장소

 

이왕 나온 김에 또다시 동네 산책을 잠시 한다. 안 가본 골목길만 찾아서 걷는다. 한 집 돌담 앞에 멈춰서 생각한다. 저런 집에서 남은 인생을 살면 어떨까? 조금 공사를 하고, 마당에 잔디를 깔고, 느리게 아주 느리게 사는 것이다. 지금처럼 읽고 쓰고 걷고 생각하고 기도하며 사는 것이다. 그럼 누가 밥은 먹여주는가? 노동할 거리가 있는가? 괜한 헛바람만 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금등리 마을

숙소로 들어오다 보니 현관 입구에 매니저 집사님이 작은 양파와 감자 세 개를 갖다 두셨다. 그냥 올라가려다가 다시 내려와서 감자 2개, 양파 2개를 들고 들어온다. 내 평생 요리라고는 라면과 밥 밖에 해본 적이 없고, 관심도 없는데, 요즘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매일 양파 한 개씩 먹고 있다. 오늘은 감자를 삶아봐야겠다. 유튜브를 검색해 보니 아주 간단하다. 물 붓고, 소금 좀 뿌리고, 30여분 삶는다. 그 이후엔 물을 버리고 약불로 4분 정도 또 삶는다. 과연 내가 삶은 첫 감자, 맛이 어떨까?

햇감자 두 개

감자 한 조각을 베어 문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와하하~~~~~" 세상에 이렇게 감자가 맛있다니. '하나님, 감사히 먹겠습니다.'

감자 두 알에 행복감이 밀려온다. 한 입 물고 아내한테 전화해서 마구 자랑을 한다. 내가 감자를 삶았어. 근데 너무 맛있는 거야. 와하하! 

 

나는 왜 요리를 하지 않을까. 왜 관심도 없을까. 그러니 요리하는 이의 수고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그래서 오랫동안 요리하는 아내에게 도움은커녕 늘 억울한 마음만 증폭시켰다. 그 수고를 알아주지도 않고, 도와주지도 못했다. 물론 설거지는 기똥차게 잘한다. 아내가 요리할 때 옆에서 야채 씻고, 설거지하고, 그릇 정리하고, 쓰레기 버리면서 조수 역할은 잘한다. 언젠가는 요리를 배울 것이다. 아마도 내가 비로소 사람됨을 깨닫게 되는 날 요리가 시작될 것이라 생각하곤 했다. 이제 시작할 때가 다가오나 보다. 감자 두 알 삶은 것 가지고 별별 상상을 다했다. 암튼 무쟈게 맛있고 무쟈게 좋았다. 

 

숙소에서 쉬는걸 다들 아는지 여기저기 전화가 계속 온다. 아들 현승이도 전화가 왔다. 9월 2일 입대신청을 했고 15사단 신병교육대로 입소하게 된단다. 15사단은 화천이란다. 덜컥 걱정이 된다. 93년 1월 5일에 나는 춘천 102보충대를 거쳐 22사단 고성에 배치됐다. 추운 겨울을 세 번 지났다. 그때 듣기로 강원도 사단 중에 화천이 가장 추운 곳이란 말을 들었다. 그게 크게 각인이 되었나 보다. 현승이가 그 추운 곳에서 겨울을 두 번 나는 군생활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하니, 안쓰럽고 걱정이 앞선다. 물론 잘할 거라 생각한다. 이왕 가는 거 좋은 경험 하고 고된 훈련도 잘 받으면 결국 좋은 일이다. 잘 할 것이다. 나도 잘 하지 않았나. 아들도 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