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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12] 수다와 보행

이민재 목사를 만났다. 제주에 살고 있는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 다니던 모교회 1년 후배다. 장신대를 나와 통합측 목사가 됐고, 나는 무늬만 고신 목사가 됐다. 청소년 시절 이후, 한참 세월이 지나 다시 연락이 됐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한 십여 년 전에 제주로 내려왔다. 서귀포 외곽 마을에 터를 잡고 목회를 한다. 한때 동네 주민들의 귤 농사를 내륙으로 연결해 주는 일도 시도해 보았고, 나는 그를 통해 맛있는 귤과 한라봉을 저렴하게 몇 차례 구매한 적도 있다.

 

그와 내가 있는 곳 중간 쯤인 모슬포항 근방에서 만났다. 나는 한경에서 버스 타고 가고, 그도 서귀포에서 버스 타고 왔다. 참 대화할 맛이 나는 친구다. 그는 나보다 좀 더 진보적이다. 독서량도 많고, 아주 시원~한 욕도 찰지게 한다. 주제 제한 없이, 서로 적절하게 헤아려보는 것 없이, 교회, 신학, 자녀, 정치, 두루두루 폭풍 수다를 떨었다. 좀 더 따뜻하게 질문하고, 말 그 이면에 있는 마음의 소리도 헤아려보고, 공감도 해야지 하며 미리 여러 번 마음먹었지만, 수다가 시작되는 순간 모든 걸 잊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는데, 그도 같은 심정일지는 잘 모르겠다. 

 

좀 안쓰러웠다. 나이 오십인데, 오래전에 콩팥이 망가졌다 한다. 이미 한쪽은 오래전에 사용 불능이고, 그나마 남은 하나도 30% 기능밖에 못한다 한다. 그것도 이제 수명이 1~2년 정도 남았다 한다. 뜻하지 않은 질병이 실존적 고민과 선택을 하게 했으리라. 제주로 내려와서 시골생활을 시작하게 했으리라. 교회에서 종종 부르는 찬양이 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그냥 생각없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진정 몸이 약할 때 우주 최강 예수 그리스도의 강함에 연결되어 보람 있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냥 수다떨다 헤아지다 보니 사진을 못 찍었다. 아쉽다. 

 

새벽에 일어나 읽고 쓰는 일을 했지만, 아직 걷지를 못했다. 그와 헤어지고 난 후 곧장 걷는다. 모슬포항 근방에서 시작하여 서쪽 해안길을 따라 신도포구 근방까지 한 12km를 걸었다. 걷다 보니 젊은 커플 몇이 휴대폰을 들고 바다를 향해 집중하며 서 있다. 몇몇 여성들은 폴짝 뛰며 놀란 기색이다. 돌고래를 본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내 눈에 안 보인다. 내 시력 문제인지 모르겠다. 본 듯 못 본 듯하다. 보았다 치기로 했다. 

제주 대정 돌고래 보는 곳

 

걷기

읽는 것보다

쓰는 것보다

먹는 것보다

자는 것보다

지금은 걷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긴다. 왜 그런 것일까 걷는 행위가 도대체 뭐길래? 이국적인 자연 풍광을 볼 수 있기 때문일까? 왜 걷는 게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일까? 걷다 보면 사유에 집중하게 된다. 사유 끝에 열리고 펼쳐지는 신비와 통찰도 가끔 찾아온다. 걸으면서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곤 한다. 일종의 대화같다. 걸으면서 나의 정체와 소명을 묻는다. 흐리멍덩해진 내 자아를 박박 닦고 또 닦는다. 그래서 내 타고난 자아의 생김새가 드러난다. 때론 아프다. 그렇게 사라지고 싶기도 하고, 때론 희망이 솟는다.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많이 걸었다. 그러나 더 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