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15] 고독, 침묵과 친해지기

신의피리 2024. 4. 15. 21:36

갑자기 걷는 시간이 많아지니 당장 무릎에 무리가 가나 보다. 무릎 통증이 생겼다. 해서 오늘은 숙소에서 늘어지게 쉰다. 쉴 때는 책을 읽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모처럼 독서량이 많은 오전이다. 

 

아무래도 좁은 숙소에 종일 있으려니 몸이 늘어진다. 몸이 늘어지면 영혼도 탁해지는 것 같다. 불안감이 솔솔 몰려온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있어도 괜찮은 건지 싶다. 잠시 밖에 나가 걷는다. 바다로 나간다. 돌담 사이를 걷는다. 이 마을 저 마을 골목골목을 한량처럼 느릿느릿 걷는다. 느리게 걸을 때는 뒷짐 자세가 최고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손이 뒤로 돌아간다. 

 

느리게 걸으면 자세히 보인다. 새삼 길가에 핀 꽃들과 여기저기에서 지저귀는 새들과 위험한 아스팔트를 가로지르는 벌레들에 눈과 귀가 쏠린다. 눈에 들어오는 것과 귀로 들려오는 것 사이사이에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안쓰럽고, 기특하고, 미안하고, 보고 싶다. 

 

자연 풍광과 마을 이모저모에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어보지만 어딘가 심심하다. 

판포리 마을

 

금등리 마을

 

셀카를 찍자니 맨날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역시 지겹기는 마찬가지다. 지나가다 우두커니 서 있는 이에게 요청한다.

"저, 저랑 같이 사진 한 장 찍어주실래요?"

해녀랑 셀카 한 장

 

해녀가 누굴 좀 닮은 것 같았는데, 돌아와서 사진을 찾아보니 누굴 닮긴 닮았다. 

 

한적한 마을 한가운데에 카페가 있다. 이 카페에서는 무얼 파나 심심해서 검색을 하니 뉴질랜드 파이가 주메뉴란다. 들어가보니 실내는 시골집 분위기다. 손님은 없다. 젊은 여주인에게 파이를 살 수 있냐고 물으니 진열대에 있는 것을 보여준다.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세 종류다. 주인은 뉴질랜드에서 살았고 지금도 여동생이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산다고 한다. 지난 3월에 뉴질랜드에서 미트파이를 먹어봤다고 하니, 한국 사람들은 그런 게 있는 줄도 잘 모르는데 신기하다고 한다. 소고기와 닭고기 파이 2개를 샀다. 오늘 저녁은 이걸로 해결한다. 맛은? 기대 이상이다. 물론 테아나우에서 먹은 미트파이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제주 한경 시골에서 근사한 미트파이를 먹게 될 줄이야!  

코코메아 미트파이

 

하루의 해가 저물었다. 나는 오늘 먹고 읽고 쓰고 걸었다. 안식월이라는 선물이니 가능한 일이다. 생산적인 일, 의무로 해야 하는 일이 없어도, 땀흘려 노동하는 일이 없어도 전혀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산만했던 사유가 무게 중심을 잡게 되고, 아무 성과가 없어도 마음 안에 평화를 유지하며, 하나님 나라에 주파수를 맞추며 깨어 있을 수만 있다면, 그러면 족한 것 아닌가. 제주 생활 그 이후, 안식월 그 이후, 그 이후를 대비한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계획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그냥 오늘 바람이 부는 대로 살아보는 것이다. 오십 평생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보지 않았다. 물론 내 마음 중심엔 스스로 경계밖으로 자신의 존재를 밀어낸 수도사의 영성이 꿈틀댄다. 제주에 혼자 온 것도 그것 때문이다. 고독, 침묵과 친해지고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