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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3] 4월3일에 제주 두모리를 걷다 거라사 광인을 생각해 본다

신의피리 2024. 4. 3. 20:24

어제 오후부터 내린 비가 밤새 이어지더니 아침에도 그치지 않는다. 날씨 정보를 보니 저녁까지 내내 비가 온다 한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늘 읽을 책과 보이차 한잔을 내렸다. 잠시 비가 소강상태가 되자 얼른 창문을 열고 창가에 앉았다. 

비오는 늘랑비

 

책 서너 권을 사두고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로완 윌리엄스의 책을 펼쳤다. 최근 중세 수도원에 대해 관심이 생겨 연이어 관련 서적들을 읽었다. 수도원의 역사 중심엔 베네딕토가 있다.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한 나는 베네딕토를 모른다. 영화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좀 알지만. 그런데 2천 년의 기독교 교회사 중에 가장 오랫동안 큰 영향을 미친 이가 베네딕토라는데,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게 좀 부끄럽게 여겨진다. 3개월 안식기간 중에 내가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싶은 주제가 되었다. 

 

수도원의 탄생, 수도회 길을 묻다, 수도원에서 배우는 영성 훈련 
"모든 사람은 남을 조종하려는 충동에 너무나도 손쉽게 이끌립니다. 사막 교부들은 우리가 이러한 충동에 휘말릴 때 드러나는 대표적인 태도로 산만함inattention을 꼽습니다. 여기서 산만함이란 자기집착self-obecession과 자기만족self-satisfaction으로 인해 시야가 가려져 자기 앞에 있는 것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로완 윌리암스, 사막의 지혜, 38)

 

몇몇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얼굴에 나도 대입해 본다. '남을 조종하려는 충동'은 목사로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봉사자를 임명하거나 부탁할 때, 교회를 위해 자원자들을 모집할 때, 은근히 거룩한 소명을 거론하며 남을 조종하는 일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하나님 노릇 놀이에 빠지는 것이다. 밑줄 쫙 긋고, 잠시 압정을 꽂고 문장을 음미한다. 

 

엉덩이가 아파서 들썩거리다 날씨를 보니 낮 11:30부터 1시까지 비가 그친 것으로 나온다. 창밖을 보니 거의 빗방울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이때다 싶어 밖으로 뛰어나간다. 1시간이 주어졌다. 이번엔 두모리 삼거리 쪽으로 간다. 오전에 봐둔 식당이 있다. 제주고기국수를 먹을 생각이다. 

 

제주 한경면 두모리

 

30분 정도 걷다 뛰다 해서 '국수夢'이라는 식당에 도착했다. 나를 포함해서 네 팀이 있다. 고기국수를 주문하고 20분을 기다린다. 

국수몽, 고기국수

 

돼지고기가 잘 삶아진 것 같다. 식감이 좋다. 기대 이상이다. 9천원이면 가격도 적당하다. 시간은 12시 20분이 됐다. 그런데 이런, 비가 쏟아진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어쩔 수 없이 작은 우산을 꺼내 들었다. 제주에서는 우산이 별로 쓸모없는 것 같다. 바람이 사방에서 정신없이 부니, 수시로 뒤집어진다. 신발이 다 젖었다. 원래는 30분이라도 신창리포구 근방을 가려고 했는데,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에아리 독채 펜션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신창리와 두아리를 잇는 도로길이다. 제주도 고유의 돌담길과 그 사이에 있는 전통가옥들 구경하는 맛이 있다. 그런데 이건 뭔가, 카페인가 싶었는데 '에아리'라는 이름의 독채 펜션이란다. 나도 제주한달살이를 처음 생각했을 때 저런 집 비슷한 것을 상상했던 것 같다. 비용이 만만찮다. 

 

오늘은 4월 3일이다. 제주4.3일이다. 마침 나는 제주도에 와 있다. 그러나 비가 오고 차도 없어 숙소에만 머물러있다.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냥 머물러 있는다. 문득 2018년도에 했던 설교가 떠올라 다시 찾아 읽어보았다. 4월 3일이 지난 직후 한 설교였다. 마가복음 5:1-15을 본문으로 삼고, '거라사 광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나는 본문을 평소와 달리 보았다. '군대'라는 이름을 가진 귀신 들린 자가 거라사 지역 무덤에 매여있다.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는다. 귀신이 돼지떼 2천 마리로 들어가 바다로 내달려 몰살당한다. 이 본문은 많은 의문과 질문을 가져온다. 나는 이 본문을 로마 제10군단이 이 지역에서 행한 학살에 주목했다. 예수님의 치유사건을 거라사 지역 공동체 모두를 옭아매고 있는 학살공포로부터의 치유사건으로 보았고, 이를 제주 4.3 사건에 적용해 보았다. 그때 고은 시인의 시, '오라리'도 읽었다. 

 

오라리, 고은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담배꽁초를 던졌다

침 뱉었다

오라리 마을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손자는 불응했다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세게 때려 이새끼야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세게 때렸다

영감 손자 때려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쎄게 쳐

세게 쳤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울면서

서로 따귀를 쳤다

빨갱이 할아버지가

빨갱이 손자를 치고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이게 바로 빨갱이의 놀이다 봐라

그 뒤 총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임차순과

손자 임경표

더 이상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총소리 뒤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거라사 광인, 제주 4.3 사건, 그리고 오늘의 나, 이 연결을 생각해 본다. 

 

설교문 첨부. "거라사 광인" / 마가복음 5:1-15

막 5_1-15_주일설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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