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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안식9] 참소하는 목소리 vs. 현존하라는 목소리

신의피리 2024. 4. 9. 18:32

색다른 아침을 맞고 싶었다. 차를 반납하는 날이니 어차피 제주시로 가야 한다. 차를 가지고 새미은총의동산으로 간다. 어제 오후 아내와 가려고 했는데 아내 몸이 안 좋아 가지 못했다. 혼자 가서 기분이라도 낼 겸 출발한다. 아침 8시라 아무도 없다. 혼자 드넓은 은총의 동산을 거닌다. 2천 년 전 십자가에 희생당하신 예수님의 그 죽음이 어쩌다 내 인생과 만나게 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비다. 의심 많은 도마와 같은 내게는 더더욱 신비다. 내 몸과 마음이 정결하게 되기를,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에 머물고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들기를, 그래서 이 괴로운 슬픔과 외로움이 잊히기를.

새미은총의동산

실은 은총의동산보다도 카페이시도로가 내 진정한 목적이다. 8:30부터 카페가 오픈한다. 늘 느끼는 거지만 한국 가톨릭의 인테리어, 예술, 문화 감각은 참 예쁘다. 에스프레소 콘파나와 막 나와 따땃한 크로와상 하나를 시켰다. 맛있다. 지난밤 내 심장을 할퀴고 지나간 외로움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카페 바로 옆에 성이시돌 피정의 집이 있다. 사진을 아내에게 보냈더니, 자신은 다음에 이곳으로 꼭 피정을 오겠단다. 뉴질랜드에서 양 목장에 오래 머물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하길래, 여기서 실컷 목장 체험하라고 말해줬다. 

카페이시도로와 성이시돌 피정의 집

 

제주시에서 차를 반납하려고 하는데, LPG를 너무 많이 충전했다. 너무 아까와서 최대한 돌아다니다가 반납해야 한다. 1115번 중산간도로를 탄다. 왼쪽엔 육중한 한라산의 우거진 숲이 펼쳐져있고, 오른쪽엔 저 아래 서귀포와 바다를 내려다보며 호젓하게 달린다. 상효원을 지나 1131번 성판악입구로 오르는 길을 탄다. 늘 이 길은 아내를 옆에 태우고 지났는데 오늘은 혼자 달린다. 내리막길에서 사려니숲길 입구 쪽으로 들어간다. 거대한 숲이 담벼락처럼 펼쳐진다. 뉴질랜드 남섬 부럽지 않은 길이다.  

렌트카 반납하는 길

 

차를 반납한다. 공항 담벼락 옆이다. 지도를 검색한다. 올레길 17코스가 공항 건너편 바닷가 길이다. 무작정 걷는다. 비행기가 머리 위로 지나간다. 도두항 도두봉에 오르니 제주국제공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에서는 비행기가 착륙하기 위해서 하강한다. 아주 부드럽게 착륙한다. 그러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출발하는 비행기가 반대편을 향해 제트엔진으로  힘을 받아 이륙한다. 착륙과 이륙의 교통이 아주 완벽하다. 기가 막힌 질서다. 

 

제주국제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

 

도두봉에서 바라본 제주국제공항

 

도두봉무지개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다. 드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중국 단체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는다. 우리 한국말 외에 다른 외국어는 죄다 중국말이다. 중국관광객이 다시 제주에 들어오나 보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스타벅스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글을 읽고 있는 중에 자꾸 내면 어디선가 잡음이 들린다. '여기서 뭐 하고 있냐?' '이 모든 게 다 의미 없는 일 아니냐?' '너는 보잘것없는 미미한 존재일 뿐이야. 그 누구도 너의 부재를 아쉬워하거나 그리워하지 않잖아?' 참소하는 자의 목소리다. 이럴 때 대처방법을 아내가 알려줬다. 숨을 인식하며, 현존에 집중하는 것이다. 밖의 소음을 끊고 안의 소리도 잠잠케 하며 침묵과 고독에 오롯이 머무는 것이다. 고독과 침묵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다. 지금 현재 여기에 내 몸과 내 마음과 내 영혼이 머물러 있다. 지금 여기를 인식하면 마음에 공간이 생기고, 하나님의 영 안에서 따뜻하고 평화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그분의 평화가 내게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보말칼국수와 스타벅스

 

참소하는 자가 지긋지긋하게 따라와서 속삭인다. 그러나 그럴수록 현존 훈련의 강도는 더 세진다. 지금 여기 오롯이 머물며 현존하라는 목소리는 아내의 목소리다. 아내는 목소리로 나와 항상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