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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4] 무명서점에서 만난 책

신의피리 2024. 4. 4. 20:20

오늘은 비소식이 없다. 무조건 걷는다. 최대한 걷는다. 생각만 해도 들뜬다. 

 

펜션 1층에 있는 "카페온결"이 오늘 오픈한다. 커피가 고프다. 걸을 준비를 갖추고 카페온결에 들려 커피 한잔 마신다. 어젯밤부터 읽기 시작한 승효상의 <묵상>을 꺼냈다. 2019년 로마-이탈리아-프랑스에 있는 수도원을 다녀온 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전형적인 보수신앙을 가지진 않았으나 영성이 깃들어 있다. 그의 건축 철학은 그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카페온결, 승효상의 <묵상>

 

5월에 2주간 베네틱토 수도원 순례를 다녀올 계획이다. 여행 전에 수도원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려고 자료 검색하다 알게 됐는데, 재밌고 유익하다. 

 

씩씩하게 밖으로 나왔다. 오늘 걸을 곳은 월령선인장마을과 금능포구다. 야속하게도 가랑비(?)가 내린다. 우산을 펴기도 그렇고 그냥 걷기도 애매한 비다. 어쩔 수 없다. 

제주 월령리 선인장 군락

 

바닷가 현무암 사이에 선인장이 펼쳐져있다. 비 오는 바닷가에 선인장이라니! 기묘한 조합이라 그런지 낯설고 재밌다. 생긴 모양도 다 비슷비슷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토끼모양처럼 생긴 것도 있다. 

 

어쩌다가 보니 제주올레길 14길에 들어섰다. 내친김에 올레길을 걷는다. 식사할 곳은 금능포에 있다. 가는 길이 올레길이니 안 걸을 수 있나. 가랑비야 좀 맞으면 어떤가. 2020년 8월 30도 무더위에 올레길 7,8,10길을 걸었던 날이 떠오른다. 그때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미친 사람처럼 걸었는데, 이번엔 가랑비를 맞으며 처량한 사람처럼 걷는다. 

제주 올레길 14코스, 월령~금릉 구역

 

올레길을 걷다 보면 길이 헷갈릴 때가 있다. 분명 길을 걷지만 전혀 길처럼 보이지 않는 곳이 있고, 사람 사는 동네 골목에 들어서면 어느 골목길이 올레길인지 헷갈린다. 그럴 때는 빨간색/파란색 이정표를 찾으면 된다. 

올레길 이정표

 

가랑비를 맞으며 바닷가 올레길을 걷던 도중 현웅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혼자 걷는다고 하니 하하 웃으며 말한다. 부럽기도 하고, 왠지 청승맞아 보이기도 하단다. 맞다. 그 두 감정을 다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수도원 기행을 준비하고 있고, 수도사 영성에 흠뻑 빠져 있다. 침묵과 고독은 내 친구가 되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기꺼이 맞이해야 하며, 내 삶에 일부로 항상 확보해야 한다. 홀로 걷는 것처럼 침묵과 고독의 방으로 들어가기 좋은 방법이 없다. 현존하는 비결이고, 하나님과 마주하며 대화하기 딱 좋은 자세다. 

 

점심식사는 숙소에서 추천해준 곳으로 왔다. 가격대가 좀 세다. 가장 저렴한 것으로 선택했다. 실은 며칠간 면만 먹었기 때문에 밥이 무척 당겼다. 

금능마을 성아시, 흑돼지제육덮밥

 

비 때문에 더이상 오래 걷는 것은 힘들다. 마침 식당 앞에 책방이 있다. "북스토어 아베끄"라는 이름의 작은 책방이다. 마침 여성 손님 네댓 명이 서서 책을 보고 있어서 덩치 큰 남자가 오래 서 있기가 좀 불편하다. 대충 둘러만 보고 나가려고 했는데, 만화에나 나올법한 강아지 한 마리가 쪼로로 와서 내 옆에 가만히 누워 가지 말라 하는 것 같다. 전혀 내 취향이 아닌 책들 사이에서 익숙한 기독교 서적 하나가 눈에 띈다. 유일한 기독교 서적 한 권이 저 속에 있다니. 주인이 크리스천인가?

 

<어쩌다 거룩하게>, 나디아 볼즈웨버, 바람이불어오는곳

 

키가 180이 넘는 데다 문신을 한 성공회 여성 사제가 성찬을 집례 하는 사진을 보다 묘한 감정을 느꼈다. 겁나 멋있는 거다. 그의 신학과 교회는 내가 지향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다만 그는 몹시 거칠고 힘든 젊은 시절을 보냈고, 나는 몹시 범생이 시절을 보냈다는 점은 큰 차이다. 눈여겨본 저자라 그런지 무척 반갑다. (실내에서는 책을 구매하지 않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다 한다. 사진 찍기 위해 책을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북스토어 아베끄

 

내친김에 서점 하나를 더 찾아가기로 한다. 숙소 근처 신창리에 '무명서점'이 있다. '아베끄' 못지않게 작다. 여긴 손님이 없다. 편하게 책 구경을 할 수 있겠다. 역시 내 취향의 책들은 없다. 그러다 작은 책 하나가 눈에 쏙 들어온다. 

 

<여행의 장면>, 10명의 저자 中 '서해인' 

무명서점, 신창리

 

해인이는 내가 한영교회에서 청년부를 지도할 때, 청년부 주보팀장이었다. 글을 잘 썼다. 감각이 좋았다. 서재석 대표님의 딸답게 글쓰기와 편집의 감각을 물려받았다. 그런 해인이가 이젠 책을 여러 권 쓴 작가가 되었다. 게다가 해인이가 쓰고 발송하는 뉴스레터 <콘텐츠 로그>는 이제 글 좀 쓰고 책 만드는 이들 사이에서 꽤나 알려진 모양이다. 해인이의 책을 여기서 발견하다니! 너무 기분이 좋아서 하루알바생으로 와 있는 친구한테 자랑을 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날 보며 말한다.

 

"교수님이세요?"

 

그냥 나올 수가 없어서, 아무 책이나 하나 골라 샀다. 저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다. 그냥 제목만 보고 골랐다. 아르바이트생이 도장을 찍겠냐고 묻기에 다 찍어달라 했더니, 도장 세 개를 정성껏 찍고 나서는 카메라로 내가 산 책을 찍는다. 지금까지 도장 세 개를 다 찍은 손님은 내가 처음이란다. 

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장편소설

 

나는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의미 없는 대화를 싫어했고, 의미 없는 글은 쓰지도 않았다. 의미는 생명이고 진리에 가깝다. 사태, 상황, 사물, 사람, 그 안에 '의미'를 길어 올리는 것이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일들이다. 그런데 이젠 그런 게 좀 지친다. 의미를 억지로 짜내는 것 같고, 더 이상 발견할 의미도 없어 보인다. 젊었을 때 내가 싫어했던 방식의 글을 쓰고 있다. 그냥 내가 오늘 경험한 하루의 나열... 그러면 또 어떤가. 오늘 제주 신창리 무명서점에서 해인이 책을 만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