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1] 아픈 바람

신의피리 2024. 4. 1. 23:20

공항버스를 탔다. 운전사께서 운전을 시작하다 말고 뒤돌아보며 내게 묻는다.

"국내선 맞지요?"

"네"

"근데 가방이 꼭 국제선 타는 사람 같네요."

"오래 있어야 해서요."

공항버스 4300번

 

오늘부터 4/29(월)까지 28박 29일 제주에서 혼자 한달살이를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장소/숙소가 중요하다. 리서치를 한다. 내 형편으로는 좋은 환경, 좋은 숙소는 택도 없다. 감사하게도 제주에서 올해 담임목사가 된 이성실 목사님이 도움을 주셨다. 교인이 운영하는 펜션 늘랑빌(제주도 한경면 일주서로 4428, 카페온결)을 소개해주셨는데, 목회자는 50% 할인이란다. 한적한 곳에 3층짜리 건물이 있다. 1층은 예쁘게 생긴 카페다. 3층 숙소는 복층으로 되어 있고, 창문으로 길 건너 바다가 보인다. 꿈에 그리던 장소다. 한 달간 피정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제주 한경, 늘랑빌 301호

 

짐 정리를 하고, 샤워를 마친다. 제일 중요한 장소가 책상이다. 읽을 책을 쌓아 올려둔다. 생각과 감정을 기록할 노트북을 펼친다. 음악을 틀어놓는다. 조명을 은은하게 바꾼다. 자, 이제 시작이다. 제주 안식월 첫째 날, 쓸 거리가 있다. 그 누구보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아내가 먼저 글을 써서 보내왔다.  "아픈 바람"

 

'감정 전문가' 아내에게 말했다. 

"요즘 내 부정적인 감정들이 다 다른 것을 알겠어. 감정들이 뭔지 알겠어."

 

마음, 가슴 언저리가 아프고, 머리가 어지럽다. 대충 뭣 때문인지 알겠다. 근데 그 감정에 오롯이 머물기보다는 벗어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즉각적인 해소를 위해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뒤돌아보면 썩 좋지 않은 방법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감정들을 주목하게 된다. 

 

그 감정은 분노였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복수를 위한 상상력과 스토리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아름답고도 장엄하며, 정의롭고도 잔인한 복수극 시나리오 작업을 멈추어야만 했다. 그것은 분노였다. 

 

그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비극처럼 여겨졌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고, 당장이라도 사표를 쓰고 사라졌으면 싶었다. 주로 설교나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난 후 찾아오는 감정이다. 소멸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그 쓰린 감정이다. 

 

그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아픈 어머니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나는 좋은 사람이 못된다. 천국에 들어간다면 아마도 쥐구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최하급 존재가 될 것이다. 죄책감이 내게 주는 상급이자 벌이다. 

 

그 감정은 불안이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 오늘 이 자리에 오롯이 머물면 사라질 감정이건만, 나는 부유하고 있다. 알 수 없는 내일이 오늘 지금의 나를 잠식하고 있다. 가슴이 벌렁거린다.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에 발 딛고 있는 나, 현존'만이 해결책이다.

 

그 감정은 딱히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가슴이 울렁울렁거렸다. 쓰라리게 밀물처럼 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고통이다. 어쩌면 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아내에게 말했다. 최근 내게 연이어 벌어지는 이 감정들이 뭔지 알겠다고 했다.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가슴통증이라는 것의 원인들, 그 바람들의 결을 알겠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아내가 그 감정은 '슬픔과 그리움'이라고 했다. 맞다. 오래전 신대원 다닐 때 월요일마다 느꼈던 그 감정이다. 어린 두 아이와 아내를 집에 두고 혼자 큰 가방을 들고 천안 기숙사를 내려갈 때마다 느꼈던 감정이었다. 아버지를 천국에 보내드리고 난 후 오랫동안 가졌던 느낌과도 비슷했다. 세월호, 이태원에서 희생된 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쓸고 지나가는 감정도 비슷한 종류였다. 

 

안식월 첫날, 내게 불어온 바람들에 이름을 붙여본다. 그 바람들이 지나간다. 나는 어떤 바람으로 남을 것인가. 

 

예수회의 창립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영신수련의 하나의 과정으로 여겼다던 그 방법이다. 내 감정이 황폐화되었을 때, 그 감정을 주목하는 것이다. 황폐화시키고 사라진 그 바람의 정체는 무엇이었던가. 그 바람에 나는 어떻게 반응했던 것인가. 다시 그 바람이 불어오면 그때는 좀 다르게 반응할 수 있겠는가. 이 성찰이 나를 성숙시킬 것이다. 그래, 나는 20여 년이 넘게 이 훈련을 해왔다. 29일간, 제대로 해보련다. 29일간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되어 있을까

 

늘랑빌 첫째날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