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에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독일 뮌헨으로 건너왔다. 뮌헨은 독일어로 "수도자들의 공간(forum apud Munichen. 현대 독일어로 치면 bei den Mönchen)"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는데,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이 도시를 건립했다 한다. 그래서 뮌헨의 휘장에는 수도자 그림이 새겨져 있다. 비행기에서 내려 출구로 나오기까지 별다른 검색 없이 금새 나왔다. 유럽연합국가 간에 맺은 조약 때문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이렇게 장벽을 없애니 얼마나 좋은가.
날씨가 춥다. 로마와 다르다. 뮌헨이 해발 600여 미터 고지란다. 그러고 보니 알프스 산맥과도 가깝다. 빙하로 덮힌 알프스 산을 볼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오늘은 날씨가 흐리다. 언젠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이 오겠지.
가이드를 만난다. 가이드가 급히 바뀌어서 그(녀)도 스위스에서 막 도착했다. 멀리서 오던 버스가 교통사고로 많이 늦는다 한다. 급히 8명씩 밴으로 나눠 타고 성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간다. 일단 짐을 수도원 입구에 있는 서점에 맡겨두고 순례할 예정이었는데 문이 잠겨 있다. 가랑비가 계속 내린다. 일이 술술 풀릴 때도 있지만 반대로 하는 일이 죄다 안 될 때도 있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다. 이 순례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인솔자이자 베네딕토 소속 신부님께서 건강상의 이유로 독일로 함께 오지 못했다. 순례팀은 갑자기 리더를 잃었다. 가이드도, 순례팀 단장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순례팀원들에게 불안한 기색이 보인다. 예의주시하며 상황을 살펴본다. 그런 상태에서 독일로 넘어왔건만, 오자마자 일이 계속 꼬인다. 그러나 인생이 항상 그렇게 흘러가진 않는다. 반드시 반전이 일어날 것이고, 잃었던 이들은 다른 것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며, 결국엔 잘 될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마음을 지키는 것이 곧 믿음이고 소망이며 사랑이다.
그럼 그렇지. 내게 주어진 첫번째 보상은 독일 시골 마을 풍경이다. 한 편의 그림 같은 밀밭이 드넓게 펼쳐져있다. 탁했던 마음이 정화된다.
성 오틸리엔 수도원(Erzabtei ST. Ottilien)으로 우산을 쓰고 가이드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걸어들어간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자, 마음이 포근해진다. 내 눈엔 우리나라 시골 성당 느낌이긴 했지만, 왠지 모를 정감이 있다. 성 오틸리엔 수도원은 21개 베네딕토 수도연합회 중의 하나의 본원이라 한다. 20세기말~21세기 초, 격동의 시대 때 여기 수도사들이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했고, 서울-덕원을 거쳐 지금 왜관 수도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성당 안에 36명의 순교자를 기념하는 사진이 걸려 있는데 그중에 한국인이 꽤 된다.
성당 뒷편에 작은 박물관이 있다. 수도원이 파송한 선교사들에 의해 수집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아시아의 조선관이 생각보다 잘 꾸며져 있다. 갑자기 순례의 흐름이 바뀐다. '선교'라는 단어가 귀에 접수되자 갑자기 '구령의 열정'이 되살아 난다. 그렇지. 내 정체성의 가장 밑바닥에는 복음주의자의 열정이 있다. 청소년, 청년 시절엔 얼마나 뜨거웠던가. 거대하게 지구촌 곳곳으로 흘러들어 간 복음의 물줄기 한 자락에서 나도 생명의 물을 마셨고, 그 물을 들고 다시 복음의 물줄기를 따라 살아왔다. 이 거대한 복음과 선교의 흐름을 목도하며 다시 작고 작은 나의 소명을 생각하게 된다. 복음을 전하며 살고 싶고,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매개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잘 하지 못하고 사는 것 같아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성 오틸리엔에서 동양으로 파송한 선교사들이 품고 보았던 곤여전도(坤輿全圖)를 오래 들여다본다.
아프리카 전시관도 둘러본다. 특이하게 시선을 끄는 게 있다. 목각 십자가상과 성모상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도,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님도, 내가 알던 그 얼굴이 아니다. 그동안 숱하게 보았던 잘 생기고 예쁘게 생긴 서양 미남 예수님과 미녀 어머니 마리아가 아니다. 두툼한 입술을 가진 전형적인 흑인이다. 토착화된 예수님이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은 분명 흑인이 아니었다. 아마도 지금의 중동 사람들처럼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저마다 다 자기들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상상한다. 예수님을 더 친숙한 존재로 소개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채색되지 않은 예수님, 각색되지 않은 예수님, 토착화되지 않은 예수님을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자신의 문화와 철학과 편견에 가려 편집된 예수님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과 진짜 성경 그 자체를 만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십자가에 달린 흑인 예수님 앞에서 잠시 해석의 문제를 생각해 본다.
성 오틸리엔 수도원 밖으로 나왔다. 아내는 사라졌다. 전화도 받지 않는다.아마 향심기도 중일 것이다. 깊은 기도로 들어갈 것이다. 혼자 수도원과 마을 주변 한 바뀌 돈다. 작은 동네다. 주민이 보이지 않는다. 늘 그랬듯이 홀로 걸을 때가 가장 순례의 정의에 가까워질 때다. 자매님들은 현지 수사님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얼굴이 밝아진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사고가 났던 버스가 뒤늦게 도착했다. 버스 옆쪽으로 깨진 창문의 흔적이 있다. 세르비아 출신의 기사는 그런 버스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밝고 수다스럽다. 날 보자마자 '손흥민, 사랑해요!' 한다. 눈 작은 동양 남자를 보면 다 손흥민인 줄 아나보다.
숙소까지는 한 시간 넘게 가야 한다. 다시 고속도로를 달린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뜻밖의 선물이 도착했다. 우리가 머물 에탈수도원호텔에 가기 직전 '오버아머가우 마을'(Oberammergau)에 들린 것이다. 원래 여행 계획엔 없었는데 새로 온 가이드가 잠시 남은 시간을 활용하여 만든 것이다. 1633년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오버아머가우 마을 주민들은 전염병으로부터 보호를 간구하며 수난극을 서약했고, 그 이듬해에 첫 공연이 열렸다.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수난극은 그 이후 10년에 한 번씩 열린다. 2차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는데, 지난 2020년 코로나 기간에 다시 전염병 때문에 연극이 열리지 못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2년이 지난 후 2022년에 마흔두 번째 수난극을 기어이 다시 해냈다. 2020년 교회가 폐쇄되고, 영상예배가 이루어지던 시절, 오버아머가우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 마을에 잠시 순례객으로 들리게 된 것이다. 한 300년 된 홍삼 액기스를 먹은 듯이 갑자기 마음과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역사적인 도시에 대한 선이해는 내 감상에 날개를 달아준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린다. 해발 800여 미터 되는 곳이다보니 날씨가 춥다. 나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긴팔 옷을 가져오지 못한 아내는 오들오들 떨고 있다. 아내는 급히 추위를 가려줄 옷을 하나 구입한다.
에탈수도원호텔(Klosterhotel Ettal Ludwig der Bayer)에 도착했다. 여기에 오니, 유럽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탈리아를 후진국이라고 놀려대는 이유를 알듯 하다. 알프스산맥 한 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호텔이지만, 모든 면에서 선진국다움을 발견한다. 너무 기분 좋은 마음으로 저녁 식사 후 아내와 산책을 나갔다. 계획대로 되지 않은 날이어서 혼선이 많았으나, 이 또한 과정이다. 잃은 것도 많았지만 얻은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잃을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인내하며, 얻을 때 감사하고 기뻐하며 자만하지 않으면 된다. 다 계획대로 되지 않지만, 결국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