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있는 4대 대성당을 방문하는 마음이 이상하게 착잡하다. 착잡한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어떤 종교적 의무가 있는 것 같다. 미안해하고, 착잡해해야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최소한의 자격이 있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런 마음이 나와 남 사이의 '선'을 결국 긋게 만든다. 감각적으로는 로마의 화려한 성당들에 감탄하고 즐거워하면서, 동시에 자꾸 나도 모르게 거리 두기를 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이들과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의 신심을 의심해서도 안된다.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인파들도 저마다 사정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길이 있다. 저마다 하늘을 향해 호소해야 할 이유가 있다. 형식이 다르고, 방식과 절차와 전례가 다를 뿐이다. 그렇게 허다하게 많은 인파 중에 나도 한 사람의 개신교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아주 큰 개념이다. 가톨릭 그리스도인이 있고, 정교회 그리스도인이 있고, 개신교 그리스도인이 있다. 종교와 전례와 형식은 다른 면이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우리 의지로 살아낼 수 없는 이 세상을 품는 저 너머의 하나님, 우리 생각으로 건져 올릴 수 없는 내 마음 깊고 깊은 곳에 내주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존중해야 한다. 마땅히!
어제 성요한성당 안을 들어갈 때 묘한 이중적 감정을 느꼈었다. 장엄함에 놀라는 마음과 그 장엄함을 만들어내기 위해 들어간 수많은 재물과 현란한 봉헌 수거 기술들에 대한 불편함이 뒤섞인 마음이다. 오늘날 작은 교회당 하나 세울 때도 그런데, 그 옛날, 제왕적 권력을 가진 이들이 만든 건물들이니 오죽하랴. 내 마음 한 켠에서 또 다른 목소리도 울린다. '뭘 그리 까칠하게 구는가. 언젠가 들어갈 천국의 모델하우스라고 생각하면 되지. 성당의 벽돌 하나하나에 신자들의 간절한 기도가 쌓아 올려진 천국의 모델하우스라고 생각하라. 지금, 여기서, 얼마나 많은 순례객들이 구원과 용서,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고 있는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정말 정말 나를 그냥 이해해달라. 전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건축물 중의 하나를 보았건만, 나는 무신경하게 반응하기로 작정했다. 심드렁하게 반응하기로 작정했다. 최소한의 예의라 이해해 달라.
바티칸박물관 내부를 걷는다. 즐거이 순레하는 게 아니다. 걸음을 강요당하는 노예의 심정 같다. 그리스문명의 잔재들, 중세와 르네상스가 낳은 엄청난 예술작품들이 즐비한 곳을 인파에 떠밀려 걷는다. 심드렁하게 반응하면 안 된다는 목소리가 연신 휴대폰을 들고, 고개를 들고, 감상을 강요한다. 재미와 흥미를 유발할 겨를이 없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문화재를 바라보는 순간 뒤에서 등 떠미는 인파에 밀려간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문화 보물들을 이렇게라도 보여주는 걸 고마워해야 하는 것일까. 걷는 게 힘들다. 그냥 곁 문이 있으면 나가고 싶다.
말로만 듣던 시스티나 소성당에 들어서는 순간만큼은 솔직히 살짝 흥분이 됐다.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크기로 지어진 그 성당은 예술적으로 특별한 공간이다. 높은 천장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가 푸르게 빛나고 있다.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제끼고 (우러러) 본다. 봤으니 됐다. 큰 감흥은 없지만, 사진이나 영상이 아니라 내 눈으로 직접 봤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내 두뇌 속에 각인된 인상은 별 차이가 없지만, 여하튼 내 눈으로 봤다. 암튼 미켈란젤로는 대단한 천재다. 아, 그리고 피에타도 봤다. 가까이에서 말이다. 아무도 없는 시간, 침묵과 고독의 공기가 스며오는 시간에 홀로 이 공간을 거닐며 묵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건 교황님이나 추기경님 같은 분들의 특권이겠지. 암튼, 성 베드로성당의 그 그 그 거 거 거 대 대 대 함 함 함에 할 말을 잃는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심드렁하게 반응하려고 애썼지만 난 압도당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 밖으로 나왔다. 광장에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마르틴 루터를(가) 생각했(났)다. 저 성당을 짓기 위해 유럽 전역에 면죄부(면벌부)를 파며 성당건축자금을 모으는 행위에 대해 과연 그것이 얼마나 성경적인지 공개토론을 해보자고 한 아우구스투회 수도사제 루터 말이다. 엉뚱한 생각이 든다. 이 광장 한 구석에 루터의 작은 동상 하나 세워두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다시 한번 강조한다. 나는 가톨릭과 정교회를 동등하게 존중한다. 그리고 솔직히 지금은 개신교 지도자들의 천박함에 대비된, 가톨릭의 영성의 스승들과 겸손한 교황 덕에 개신교인 됨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나는 소망한다. 서로 존중하고 서로 귀 기울이고, 서로 질문하고 서로 배우며, 서로 성장하고 서로 닮은 점을 발견하기를 말이다. 다만, 이 말 하나 첨언한다고 누구든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큰 대성당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스도 복음의 본질적 정신과 닮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점점 줄이고 더더 검소하고 최선을 다해서 비우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도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 프란체스코 교황의 행보에 지지를 보낸다. 한국에서 이 멀리까지 왔는데, 그분 얼굴 한번 뵙고 가면 참 좋겠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로마 4대 대성당 중에서 유일하게 마음 가는 곳이 하나 있었다. 산타마리아 대성당 제대 오른쪽 구석에 가면 건축가/예술가 로렌조 베르니니의 작은 무덤이 있다. 가이드가 거기에 작은 무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아내와 함께 가봤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 있는 곳이 아닌 곳,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곳, 구석 진 곳, 작고 작은 곳, 거기에 베르니니의 무덤이 있었다. 크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건축과 예술작품들을 생산해 낸 그가, 성모 마리아 곁에 작고 작은 공간에 안장되길 원했다 한다. 사람들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말이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말이다. 자고로 무덤은 작은 게 좋다. 잊히면 더 좋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진짜로 인류 역사에 남긴 좋은 것 하나는 그분의 시신이 없다는 점이다. 그분의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유해를 두고, 진짜 가짜가 넘쳐나고 성 베드로 성당의 열 배는 더 큰 성당이 건축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분의 무덤을 기념하는 성당을 짓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는 부활을 소망한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죽음 그 이후 우리는 부활한다. 부활을 소망하고, 부활의 삶은 영원하다. 그러니 이 육신으로 살다 죽어 잊힌 들 어떠랴. 조금도 아쉬움 없다.
사도 바울의 참수터를 가보지 못한 건 너무 아쉽다. 바울은 로마에서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참수를 당했다. 그 위대한 바울은 자연사당하지 못했다. 병들어 죽을 권리도 없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 그것은 영광이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했을 리가 없다. 담담히 인생 경주를 다 마치고, 영광의 의의 면류관을 기다렸던 사도 바울, 그가 이 세상에 머물렀던 마지막 자리, 거기 근처라도 가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일이 순탄치 못했다. 갑작스러운 일로 일정이 꼬였다. 그 모든 상황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헤아려본다. 바울 사도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성령이 막고 예수의 영이 막아서 결국 바다 건너 유럽의 첫 성 빌립보로 갔다. 바울의 뜻은 꺾이고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되었다. 바울 사도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그는 예루살렘에서 성난 유대인들 때문에 감옥에 갇힌다. 그는 죄수가 되어 황제에게 상소하여 결국 로마 병사들이 호송하는 방식으로 로마에 입성했다. 바울의 계획은 전면 수정되었고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되었다. 그렇다. 매사 일은 그렇게 틀어지고 계획은 흐트러진다. 그 순간이 우리는 당황스럽다. 일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틀어질지 알 수 없어 불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낙심하는 것은 순례자의 자세가 아니다. 사도 바울의 사전에 '낙심'이란 없듯이, 순례자의 삶에 낙심은 금물이다. 기다리고,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이 순례자의 자세다.
바울의 참수터에 결국 가지 못했다. 대신 성 바울 대성당에는 문 닫기 전에 겨우 들어가보았다. 그러나 그 크고 화려한 성당에서 나는 바울 사도의 흔적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 그분과 교감을 이루지 못했다. 정원 중앙에 우뚝 서서 칼을 든 바울은 어색했다. 한 번도 그런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피곤했다. 다리가 아팠다. 그러나 눈은 호강했다. 됐다. 이제는 기다리는 시간이다. 성령님이 막으셨으니 그 길을 막음으로 이끄시는 길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