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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그 땅을 걷다

[수도원기행2] 순례객은 늘지만 수도사는 줄고 있다

신의피리 2024. 5. 17. 15:57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_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 by 유홍준


순례의 성패는 이 문장에 달렸다. 사랑하지 않으면 가봐야, 만나봐야 아무 의미 없다. 사랑없이 가면 들어봐야 참된 앎에 이르지 못한다. 앎을 향한 갈망없이 암만 사진 찍고 들여다봐야 의미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관건은 사랑이다.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를 왜 가려는가. 아내 때문이다. 아내는 눈이 매력이다. 반짝반짝 빛났고 그게 내가 사랑에 빠진 이유다. 평소에도 빛나는 눈이었는데, 근래 그 눈이 더 반짝이기 시작했다. 영혼이 충만해 진 것이다. 오랜 공부와 기도 끝에 순례를 가겠다 한다. 수도원을 가겠다는 아내의 결기는 견고했다. 그 견고함이 나를 움직였다. 마침 결혼 25주년을 맞았고, 아내가 원하는 여행에 동행하는 게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난 아내를 사랑했지, 베네딕토나 수도원을 사랑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신혼여행은 아니니 공부가 필요했다. 먼저 수도원의 역사를 훑는다. 편견이 깨지는 지적 재미가 생겼다. 교회가 세속화될 때마다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한 수도원 운동이 시작됐다 한다. 그럼 내 편인데. 수도원 중심에 베네딕토가 우뚝 서 있다. 그의 규칙서는 수도원의 중심을 이룬다. 베네딕토를 중심으로 그 이전의 사막 수도사들, 그 이후의 수많은 영성의 줄기들이 가지 치며 뻗어 나왔다. 안타깝게도 개신교 쪽으로는 거대한 줄기가 끊겼다. 그게 오늘날 개신교 영성의 천박함의 한 원인이란 걸 깨닫는다.

목마름이 생겼다. 영성을 향한 열망이 뜨거워졌다. 수도원 기행을 향한 준비가 치곡차곡 되어간다.

로마 도착 후, 둘째 날 첫 수도원으로 향한다. 카사마리 수도원(Abbazia di Casamari)이다. 모든 게 낯설지만, 초기 고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수도원이라는 말에 귀가 쫑긋 한다. 수도원의 외양과 내부는 아름답고 경건함이 배어있다.


아내 눈이 빛나기 시작한다. 영혼에 불이 들어왔다.


두 번째로 가게 된 수도원은 베네딕토가 직접 세우고 규칙서를 집필한 몬테카시노 수도원(Abbazia di Montecassino)이다. 네 차례에 걸쳐 파괴되었다가 현대에 와서 재건축되었다 한다.

몬테카시노

몬태카시노는 관광지 분위기다. 관람객이 많다. 사진 찍는 이들이 기도하는 이들보다 더 많다. 사진을 찍으려는 마음이 기도하려는 마음보다 앞선다.

두 수도원에서 나는 기도하지 못했다. 역사에 관한 정보는 들었으나 마음을 울린 이야기를 만나지 못했다. 그 거대한 카사마리 수도원에는 현재 15명, 몬테카시노 수도원에는 10명이 남아 종신수도 중이라는 말만 크게 들린다. 영성을 위해 멀리 순례 왔는데, 정작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이들은 줄고 줄다 곧 문을 닫을 판이다. 교회에서도 성도가 줄고 있지만, 관광객은 넘친다. 이 생각이 차차 강화될까, 변화될까. 판단은 하지 않으련다. 신비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 아내의 걸음을 뒤따르다보면, 내 영혼도 생기나고 빛나게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