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순례, 그 땅을 걷다/베네딕트수도원기행(이탈리아독일)

[수도원기행1] 인천에서 로마까지

신의피리 2024. 5. 16. 12:48

13시간 비행 예정이다. 비좁은 공간에서 13시간을 보내야 한다. 어떻게? 일단 내게 ‘잠’은 허락되지 않는다. 청해도 오지 않는다. 내 집 내 침대에서는 청하지 않아도 잘도 오드만. 아내는 집에선 그렇게도 잠이 없더니, 참 잘 잔다. 여하튼 시간을 보낼 친구들이 필요하다.

첫 번째 친구. 영화 <나폴레옹>. 별 3. 영화와 감독 모두에게 실망. 엇나간 조국애, 전쟁광, 이해할 수 없는 조세핀과의 사랑. 잔뜩 기대한 것에 비해 실망감은 크다. 믿었던 감독인데… 혹시 나폴레옹에 대한 감독의 평가가 고스란히 영화의 수준과 관람객의 평가로 나타나게 하려는 고도의 수법일까? 에이. 2시간 30분 소요.

두 번째 친구. 영화 <Living>. 별 3개 반. 일평생 꼬장꼬장한 공무원으로 살던 주인공이 말년에 말기암 판정을 받는다. 꿈꿨던 삶이 아니었다. 남은 시간, 어떻게 살까, 어떻게 죽을까. 그는 젊은 여직원을 통해 삶의 열정을 되찾는다. 미뤄뒀던 민원 해결을 위해 남은 시간 열정을 쏟는다. 그리고 마침내 놀이터 사업을 완수하고 거기서 죽는다. 뻔한 스토리, 뻔한 반전이지만 내내 감동과 아름다움이 있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기분 좋다. 2시간 소요. 이제 3/1 지남.

세 번째 친구. 기내식. 두 번의 기내식과 한 번의 샌드위치 간식. 먹는 시간은 즐겁다. 대한항공 기내식은 먹을 만하다. 양도 많다. 굳이 다 먹을 필요는 없지만, 음식 남기는 것이 쉽지 않다. 탐식과 성격이 반반 섞였다. 운동량도 적은 곳에서 계속 먹기만 하는 내게 드디어 그분의 찌릿한 레이저빔이 발사됐다. 기가 막히게도 아내는 성 베네딕토 규칙서를 읽고 있었는데, 마침 39장 “음식의 분량“ 부분을 줄로 쫘악 긋고는 옅은 미소로 내 코 앞에 들이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과식을 피해 수도승이 결코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과식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다. ‘여러분의 마음이 과식으로 무뎌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될수록 적게 먹겠다는 전의를 불태운다.

네 번째 친구. 소설 박완서의 <나목>. 지난주 양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에 다녀온 후, 박완서의 데뷔작 <나목>이 읽고 싶어졌다. 이 소설은 박완서가 자녀 다섯을 낳고 평범한 주부로 지내다가 (고) 박수근의 유작 전시회를 계기로 쓰게 됐다 한다. 한 불우한 천재 화가가 죽고, 한 천재 소설가가 태어난 것이다. 6.25 전쟁이 가져다준 고통, 서울 수복 후의 경성 거리 분위기, 한 화가의 비참한 환경과 그것을 넘어서는 예술혼. 어디까지가 논픽션이고 어디서부터 픽션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박완서와 박수근의 상징들. 내 마음도 서서히 재건되는 1952년의 서울 거리로 동화되는 듯싶다.

시차 적응의 어려움 때문에 호텔에서 11:30에 잠들었다가 새벽 1시에 깨어 5:30까지 뒤척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는다. 쓸쓸하지만, 여기 폄범한 삶에의 열의가 달아오른다.

박수근, 나무와 여인을 배경으로 한 증강현실기법


다섯 번째 친구. 성인 세 사람. 존 카시안, 성 베네딕토, 그레고리우스 대제. 이들에 관한 아티클들을 읽는다. 이전 베네딕토 수도원 기행의 목적 때문이다. 4~7세기에 내가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면, 나도 수도승이 되었을까? 수도원 공동체 생활을 했을까? 지금의 내 성향을 고려해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더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한다. 하나님의 임재에 머무르는 체험은 어떤 것일까? 그분의 말씀에 사로잡혀 그분을 대리하는 작은 예수로 사는 삶에 성공했을까? 개신교 목회자로서 오늘날 우리 영성의 얕음이 답답하던 차, 영성의 깊은 강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긴 비행을 마치고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했다. 역사와 예술과 종교의 땅이다. 조급함을 내려놓는다. 신비를 향하여 마음을 연다. 누가 날 먼저 만나줄까. 아뿔싸 로마군인이 짐 찾는 곳에 마중나오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