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대신에 피정이라는 말을 쓴다. 편히 쉬고 푹 자고 재밌게 논다는 의미로 치면 휴가가 맞다. 그러나 홀로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하고 묵상한다면 피정이란 단어가 적절하다. 휴가와 피정 사이에서 늘 애매한 쉼을 갖다, 제대로 피정다운 피정을 체험하는 중이다.
왜관베네딕도수도원 손님의집에 2박3일간 머물고 있다. 둘째날 밤이다.
새벽 5:20 아침기도를 시작으로 6:30 기도, 11:45 낮기도, 18:00 저녁기도, 20:00 끝기도까지, 하루 5번의 기도에 참석한다. 시편과 말씀으로 구성된 기도시간이 신선하다. 멜로디를 따라 부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한 일이다. 실은 내 마음은 둘로 쪼개져 있었다. 수도원 체험도 체험이지만, 시니어매일성경에 기고할 첫번째 원고를 쓰는 게 주목적이다. 원고 쓰는 일이 우선이고 나머지 시간에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첫 날, 첫 시간부터 모든 게 어그러졌다.
도착한 후, 짐을 풀고, 노트북을 꺼낸다. 와이파이를 잡아본다. 근데 안잡힌다. 아니 잡히긴 한데, 연결이 되지 않는다. 한 시간이 후딱 지난다. 안내실에 문의한다. 이상하다 한다. 잠시 후 드디어 와이파이가 된다. 그런데 이번엔 노트북이 로그인이 안된다. 지문이 안 먹힌다. 비번과 Pin번호는 모른다. 서비스센터에 전화한다. 그래도 안된다. 또 두어시간이 지난다. 벌써 저녁이다. 애초 하려던 게 무산됐다.
왜 그런 걸까? 한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도대체 왜 이런 건가? 노트북을 가슴에 품고 기도한다. ”제발, 주님, 로그인 되게 해주세요.“ 다시 노트북을 켠다. 역시 여전히 안된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혹시 하나님이 잠그신 건가? 피정 왔으니 다 내려놓고 나에게 집중해라.’
뒤숭숭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끝기도를 마치고 방으로 왔다. 혹시나 하고 다시 노트북을 열었으나 안된다. 완전히 내려놓는다. ”주님, 알겠습니다. 원고는 신경 끄겠습니다. 그저 여기에 머물며 현존을 배우겠습니다.“
늘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던 습관을 따라서 무심코 리처드 로어의 <벌거벗은 지금>을 가져왔다. 조금은 짜증이 나고,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책을 펼쳐든다.
“지금 이 순간과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만남이 하느님과의 합일로 가는 가장 분명한 길이라는 생각, 자기를 방어하지 않고 비이원적으로 지금 여기에 벌거벗고 현존하는 것이 ‘참으로 현존 하시는 분’과 만나는 최선의 기회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140p)
리처드 로어 신부가 이 책을 쓴 목적이다. 내가 무심코 이 책을 가져왔다. 바로 현존하시는 하나님께서 분명 내 노트북을 잠가버리신 게다. 오롯이 모든 순간, 하나님의 임재에 머무는 훈련을 하시고자 함이 명백하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목 감기가 왔다. 밤새 퉁퉁 부은 목 때문에 밤을 거의 꼴딱 샜다. 수도원 정문 앞에 있는 이비인후과에서 진료 받고 약을 받아왔다. 정문 밖을 나간 김에 카페를 방문한다. 책을 읽는다. 현존을 생각한다.
호흡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지금 여기에 현존하시는 하나님
실패 낙심 고통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다.
가까이 와 계신 듯 멀리 사라진다.
알듯 말듯 가물거린다.
나는 현존하려고 몸부림칠수록 수십갈래 분심에 휘청거린다.
“주님, 노트북 신경 완전히 껐습니다. 이제 말씀하옵소서. 듣겠나이다. 성찰하는 게 아니라 존재하고 싶습니다. 생각 너머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마음으로 알아지는 하나님의 영에 들어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