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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만난 문장

존 파이퍼,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

신의피리 2007. 7. 1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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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3학기 <목회와영성>과목에 제출했던 서평

존 파이퍼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신학


목회 소명과 위기

고등학교 3학년 때 목회자로의 소명을 깨달은 지 15년 만에 신학교에 입학했다. 결심에서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존경할만한 목회자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목회란 무엇이며 어떤 목회자가 좋은 목회자인지 몰랐기 때문에 주저하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목회자에 대한 실망은 커져가고 나 자신에 대한 절망도 덩달아 깊어져갔으며 목회소명은 서서히 잊혀져갔다.

나의 젊은 20대와 30대 초반은 그래서 불행했다. 차선으로 선택한 일들마다 내게 열정이 없다는 사실이 슬펐고, 그 결과는 언제나 실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싶은 열망이 꺼지지 않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명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파산하고 난 후에야, 그러니까 내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고 선언한 후에야 비로소 그 소명은 ‘소환장’의 형식으로 내게 찾아왔다.

목회자 후보생이 된 후 지난 1년간은 참으로 행복했다. 오로지 24시간 말씀만을 생각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며, 그 말씀이 내 삶이 되길 몸부림치며 보냈던 신학생 1년여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2년차에 접어들면서 하나의 중도한 도전장이 주어졌다. 나를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즐거운 일임에는 여전하지만, 동시에 내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목마름과 나의 목회적 성공을 향한 욕망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다. 즉 최선을 다해 말씀을 가르치면 성도들이 은혜를 받지만, 그 사이에서 통로요 수단에만 머물러야 할 나의 존재는 어느새 ‘영광의 자리’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소중할수록 내 언변에 대한 자부심은 커져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찬미의 노래가 퍼질수록 내 사역의 영광을 자랑하게 되고, 사역의 열매가 나타날수록 그 수확의 수치에 치중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을 때, 이 역설적 상황이 목회자에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치명적인 질병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일까? 소명이 어떻게 성공의 도구로 변질되는 것일까? 경건이 어떻게 이익의 재료로 이용되는 것일까? 도구에 불과한 목회자가 어떻게 영광을 가로채면서 그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목회사역을 하는 것일까?

얼굴과 제목에 나타난 열정

존 파이퍼 목사님이 쓰신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라는 책을 본 순간, ‘순수한 열정’에 감지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목회자는 직업인이 될 수 없다는 데에는 평소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목으로부터 곧장 신선한 도전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도전은 존 파이퍼 목사님의 얼굴에서부터 시작됐다. 열정, 순수, 거룩함이 배어져 있는 존 파이퍼 목사님의 미소 띤 얼굴은 예사로운 표정이 아니었다. 예전에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얼굴에서 받았던 인상과도 유사한 점이 있었는데, 얼굴을 자꾸 들여다보면 볼수록 이분이 목회자들을 ‘형제’로 부르고 있는 이유와 또한 이 글을 ‘서신’의 형태로 썼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따뜻함이자 순수함이다. 그 정서만으로도 목회자의 정체성과 열정은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음이 있는 듯싶었다. 또한 제목은 목회자의 정체성을 긍정적 정의로 선언하고 있지 않으며, 도리어 ‘전문직업인’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그것은 현재 우리 목회자들의 현주소가 위기에 처했음을 강렬하게 외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다수가 이 시대의 성공주의 신화의 휩쓸려가고 있음을 직시하라고, 그 거대한 흐름에 거부하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이 책을 만지작거리며 그분의 표정과 제목, 그리고 목차와 서체로부터 이미 강한 도전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해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고, 나는 이 책을 응답하는 마음으로 한통한통 정성스럽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이 책은 총 30통의 편지로 엮여져있다. 나는 매 편지를 개봉할 때마다 마치 봄의 꽃들이 한송이 한송이 개화하는 것을 지켜보며 영혼의 환희를 느끼는 것처럼, 매 주제 하나하나가 전개될 때마다 거룩함으로 치솟아 오르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비로소 내가 꿈꾸던 목회자 상을 얻게 된 듯한 즐거움이 있었고, 목회자의 자격과 능력은 나의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달으며 오히려 자유를 누리는 즐거움이 있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

이 과제를 쓰기 직전에 존 파이퍼 목사님의 스물아홉 번째 편지 속에 있는 <아내를 더 많이 사랑하고 덜 사랑해라>라는 시를 내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하나님 사랑과 아내 사랑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참으로 감동적인 시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아내 사랑의 극진함을 이 시를 통해 아내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서른 번째 편지에는 신학교를 위한 스무 가지의 기도제목들이 있다. 나는 이 기도제목으로 매주 수요일 새벽마다 우리 신학교를 위해 기도하기로 작정했다.

이 두 가지는 목사님의 글을 읽고 당장 실천하게 된 것들이다. 이 외에도 내게 자극과 도전을 주는 편지들이 무수히 많다. 말씀 연구에 대해, 신앙 전기와 고전에 대해, 선교에 대해, 기도와 성령의 역사에 대해, 한통한통 도전이 아닌 것들이 없다. 목회자의 실력과 경건유지를 위한 노력들, 목회자의 목회 활동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마음들, 성도들을 이끌어가기 위한 제반의 노력들,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넘길 수 없는 것들이기에, 나는 가급적 한 주제 한 주제씩 다시 꼼꼼히 읽어볼 생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을 통해 가장 깊고 충격적으로 다가온 도전은 첫 번째 편지부터 일곱 번째 편지까지, 목회자가 믿고 확신하며 가르쳐야 할 기본적인 신학적 전제에 대한 것들이다. 그것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하나님 중심되심의 신학’, 혹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도, 그분의 인간을 위한 사랑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법도, 우리의 헌신과 섬김과 윤리와 삶의 근거도, 모두 하나님 중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들이라고 존 파이퍼 목사님은 말한다. 매우 당연한 사실인 것 같지만, 나는 이 부분을 거듭 읽으며 내가 알고 믿으며 또한 가르치고 있던 복음이, 어느새 자본주의 체제 속에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의 요구에 따른 천박한 맞춤복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분명 순수한 목회소명으로 시작했는데, 언제 내가 이렇게 변질된 복음에 헌신하고 있었던 것일까!

책을 읽고 나서 내 가슴에 인같이 박힌 문구가 있으니,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마치 주기도문을 습관처럼 외듯이, 하는 일마다 늘 ‘하나님의 영광’을 내뱉으며 살아왔던 것 같은데, 정작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목회자에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몰랐던 것 같다. 나는 아직 이 단어가 지칭하는 깊고 높고 광대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해보지 못한 것 같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얼마나 중요한 목회의 기초가 되며, 그 사실에 근거하여, 아니 의존하여 나의 목회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내가 얼마나 천박한 상태에 처해 있는지 모르겠다.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읽은 후 며칠 간, 목회자로 부름받았다는 행복한 즐거움이 하나님의 거룩성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곤두박질치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목마름이 생겼다.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일 뿐, 내 능력, 내 경험, 내 지식과 내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일에 불과하며 얼마나 가변적인 것들인가! 그런 것들을 여전히 은근히 의존하면서도, 이렇듯 버림받지 않고 멀쩡하게 목회자 후보생으로 훈련받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은혜사건인가! 성공해야 한다는 의식을 버리리라. 붙들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리라. 진홍빛 피 묻은 십자가 앞에서 죽고 죽고 죽으리라. 감히 내 노력으로 얻어낼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의 실체를 그림자라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