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책에서 만난 문장

클라우스 이슬러, 주님과 거닐다

신의피리 2007. 7. 10. 17:55
 
신학교 3학기, <목회와 영성> 과목에 제출했던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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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이슬러, 『주님과 거닐다』

더 느리게 더 가까이


주님과 거닐다?

‘걷기’는 매력적이다. 정상적인 발육만 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걷겠지만, 걷기는 단순한 동작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걷기는 의미를 창출한다. 일반적으로 걷기는 사고하기와 맞물려 있다. 조직적인 사고가 아니라 할지라도 걷게 되면 자연히 사고하게 된다. 그래서 걷기는 생각하는 인간됨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걷기에는 사회적 의미가 숨어 있다. 마틴 루터 킹이 걸을 때, 그 행진은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다. 부활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걷는 이들의 순례의 여정은 종교적 상승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함께 걸을래요?’라고 말할 땐,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배낭여행을 나선 젊은이의 걸음은 자유를 추구하는 탐구의 여정이다. 이뿐 인가? 하다못해 한 가장의 토요일 등반조차 행복한 가정을 향한 하나의 발돋움이다.

평소 ‘걷기’ 예찬론자인 내게 『주님과 거닐다』라는 책이 쥐어졌다. 제목만 들어도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걷기는 ‘사고하기’이며 다양한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는데, 이 모든 것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걷기가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의 깊이를 더해준다고 하니, 어찌 아니 기쁠까? 그렇지만 제목에서 받은 신선한 도전과는 달리 지금 이 글을 쓰는 일은 내게 고역이다. 왜냐하면 마치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 억지로 이끌려 산책을 나갔는데, 더불어 걷는 이와의 대화보다는 내내 다음 할 일을 골몰히 생각하며 걸은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이 책을 100미터 전력질주 하듯이 읽어버렸다.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옆도 안 보고 그냥 줄창 뛰기만 했다. 함께 보폭을 맞춰가며, 길가의 들꽃에 대해, 어제의 상한 감정에 대해, 당신의 관심사와 나의 꿈에 대해, 서로 간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한 오픈 마인드에 대해, 도란도란 얘기 나누고 싶어 하는 주님을 저 뒤로 두고, 나는 혼자 일(과제)에 떠밀려 거의 정신없이 뛰어 앞서 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원제가 말하듯이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낭비하며 천천히 느리게, 그러나 깊이 음미하며 읽었어야 제 맛인데, 무슨 인터넷에 떠도는 귀찮은 글 읽듯이 논점만 짚어가며 후딱 읽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 쓰린 마음으로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본다. 

내가 이 책을 읽는 방식이 바로 이 책의 저자가 지적한 이 시대 신자들의 질병인 것 같다.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쪼개서 일을 하여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해 놓은 건 많은 것 같지만 정작 우리의 영혼은 텅 빈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도전한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낭비하기(Wasting time with God)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더 느리게 더 가까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패션 잡지의 편집장과 그 주변의 인물들이 성공을 위해 죽어라 일만하는 문제를 다룬다.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가는 인간상을 다룬다. 잠시 쉬거나 인간애를 발휘하려 하면 바로 도태된다. 성공만이 모든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현대 목회도 이와 비슷하게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목회자의 본질 - 말씀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 - 은 제쳐두고 성장과 부흥을 위해 온갖 프로그램을 좇거나 행정에 치이고, 성도들의 평가 잣대에 휘둘리다보니 목회자는 24시간으로도 부족하다. 항상 뛰어도 만족이 없고, 그들이 강단 위에서 선포하는 말씀에는 울림이 없다. 지성적으로는 꽉 찬 듯한 현대 목회자들에게 영성의 풍요로움이 보이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목회자들의 실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클라우스 이슬러의 책은 바로 이런 현실에 포박되어 있는 목회자들에게 진정 목회자가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길 소원하는 목회자들의 영혼은 항상 하나님과의 교제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저자는 속도와 거리의 개념(더 느리게 더 가까이)으로 영성을 풀어간다. 그러니까 현대인의 과속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천천히 걸을 것을 그는 권면한다. 그러할 때에 멀리 지성적으로 감지되는 하나님이 가까이 곁에 계심을 깨닫게 되고, 수직의 신앙에서 우정의 신앙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저자는 주장한다.

‘가까이 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저자가 추구하는 하나님이다. 실은 거룩성과 자비로움은 멀리 계시는 하나님과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의 양면성을 모두 설명해 주는 개념들이다. 그런데 근대를 거치며 개념으로만 하나님을 다루게 되고, 또한 현대사회의 광속과도 같은 변화 때문에, 친밀한 하나님을 체험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수학적인 시간 개념과 분화된 일들,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따른 인과론적인 사고에 익숙해지다 보니 하나님을 체험하가 참으로 어렵게 됐고,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께 근접해 가려고 하는 인간의 몸짓만이 남게 된 것 같다. 진정 우리는 하나님의 친밀한 자비로움을 날마다 순간마다 체험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우리 시대의 영적 목마름은 이와 관련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임재 연습

저자는 성화 과정에 놓여 있는 신도의 다양한 삶의 과제들을 아주 효과적으로 풀어나간다. 추구, 우정, 겸손, 믿음, 헌신, 의사소통, 도제의 삶, 동반자 등의 개념을 건조한 설명으로 나열하지 않고, 성경의 토대 위에 다양한 작가들의 주장들과 직간접적인 체험을 병행하면서 탁월한 교육방법을 동원하여 독자들을 설득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이 책이 주는 탁월성은 각 장마다 ‘하나님과 함께 시간낭비’라는 제목의 실천 목록들과 실습방법을 적절하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칭의 이후의 성화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제적 훈련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는 지성적 교육 외에 실제적 영성 훈련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잊혀진 영성훈련방법들을 다시 복원하여 제안하고 있고, 이 훈련들은 평생을 두고 매일매일 훈련해가야 하는 것들이다. 실은 이 영성훈련들 - 묵상과 질문하기, 손대접과 영적 우정, 고백과 섬김, 깨어 있기와 금식, 피정과 일기쓰기/성찰, 하나님을 지향하는 기도와 영적 멘토와 함께하기, 애도와 변호, 믿음을 확장하는 기도와 하나님의 임재 연습 - 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데 필수적인 과목들이다. 그런데 이 영성의 과제들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치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의 제2상한에 속한 것들처럼 지속적인 연습을 통해 소중한 습관이 되도록 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서툴고 급하게 책을 읽긴 했지만 몇 가지 단어들이 마음에 남는다. 친밀한 우정, 가까이 있음, 일상을 통해 말씀하심, 인식이 아닌 체험, 지속적인 훈련…. 그러니까 하나님은 저기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여기 가까이 계시는 분이다. 어떤 특별한 영적 분야에만 관계된 분이 아니라 일상의 전 영역을 통해 말씀하시는 분이다. 단지 지적인 인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알게 되는 분이다. 그러고 보니 중세 로렌스 수사가 제안했던 『하나님의 임재연습』으로 귀결되는 듯싶다. 우리의 성화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모든 일과 모든 순간 속에서 ‘하나님의 임전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훈련이자 동시에 삶이며, 또한 우리 사역자의 사역의 핵심 중 하나가 된다.

새삼 예전에 모토로 삼았던 문구가 다시 떠오른다. ‘오늘 여기서 그분을 위해 작은 일에 충성하자’ 이왕이면 이 모토 위에 저자가 제시한 16가지 훈련목록을 마음에 새기고 내 행동과 생각과 삶의 태도에 스며들도록 해야겠다. 이를 위해 투자하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니다. 오히려 시간에 대한 신자의 바른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