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이다. 언제 끝이 오나 싶었는데 금세 그날이 왔다. 아쉽지만, 아쉬움을 주목하지 않겠다. 끝이지만 끝을 생각하지 않겠다. 충분히 좋은 시간이었고, 충분히 쉬었고, 모든 것이 충분했다. 그러니 내일 일은 걱정하지 않겠다.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할 것이라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여기를 주목하고 나는 지금 여기에서 내 삶을 에워싼 은혜를 만끽할 것이다.
독일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릴 장소는 마울브론 수도원(Kloster Maulbronn)이다. 이 수도원에 대해 역시 나는 까막눈이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위키사전을 검색해 본다. 12세기에 처음 세워진 이 수도원은 시토회가 터를 잡고 시작한 곳이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부흥하고 성장하는 수도원 운동이 세속의 지원과 부에 서서히 물들어갈 무렵, 베네딕토 규칙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이 시토회다. 그들이 시작한 수도원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 마울브론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다. 영주의 지원을 입은 개신교가 수도원을 운영하다, 다시 시토회가 차지하기를 반복했다. 16~17세기 독일은 전쟁으로 참혹한 시대였다. 로마 가톨릭과 연계된 신성로마제국과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동참한 지역 영주들 간에 죽고 죽이는 끔찍한 전쟁의 시대였다. 30년 전쟁이 일어났고, 구교와 신교는 신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며 살았고, 살다 죽었다. 그러는 동안 수도원의 주인은 계속 바뀌었다.
수도원 입구에 거대한 나무가 서 있다. 병이 들었는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이 나무는 1648년, 신교와 구교의 전쟁이 종식되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기념하여 심은 나무란다. 400여 년 가까이 살다 지금은 병이 들었다. 그새 수도원은 19세기 이후 개신교의 소유가 됐고, 그 기간 유명한 문학가 '헤르만 헤세'가 이곳 기숙학교에 머물렀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둥과 초기 고딕양식의 회랑이 과거 화려했던 수도원 시절을 보여주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수도원 뒤편에 개신교 신학교와 기숙사가 운영될 뿐, 예배당과 정원과 회랑은 관람객들만 오갈 뿐이다. 그러나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다. 이 회랑에서 아내의 시든 영혼이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집중하기보다, 회랑을 걸으며 기도에 집중한다. 생각을 내려놓고, 감정도 고스란히 내려놓는다. 오직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로만 지향할 뿐이다. 회랑이 지어진 원래 목적이다. 수백년 전 시토회 수도사들이 기도할 목적으로 짓고 걸었던 그 회랑, 그 목적에 맞게 한국에서 온 개신교 목사의 아내, 가톨릭대학에서 아빌라의 테레사로 석사과정을 공부한 한 여성이 걸으며 기도한다.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마음을 주목하게 만들어진 회랑에서 기도하던 여인은 심령이 서서히 되살아난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보았던 이름, 베스트팔렌 조약을 여기에서 만났다. 구교도들 속에 끼어서 조용히 수도원 순례를 나섰다. 인솔자인 신부님이 갑자기 건강 이상으로 병원으로 간 사이, 가끔씩 개신교 목사가 기도하며 양무리를 위로하려 한다. 이 이상한 부조화의 조화를 내내 경험했는데, 마지막 장소인 개신교 소유의 마울브론 수도원에서 화해와 평화의 나무를 만났다. 그런데 지금 나무가 아프다. 그러나 이 나무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 나무의 본질을 되살려내 계속 생명을 재창조할 것이다. 나무의 생명력은 강하다.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내 삶에서도, 내 아내의 삶에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드디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 수속을 밟는다. 조만간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공항 한 구석에서 수도원 기행 마지막 일기를 쓴다. 꿈만 같았다. 좋았다. 참 좋았다. 평화, 평화로다!
PAX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