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순례, 그 땅을 걷다/베네딕트수도원기행(이탈리아독일)

[수도원기행13: 후기] 똑똑해 보이려고 말하지 않으며

신의피리 2024. 6. 19. 11:45

휴대폰으로 지난 수도원 여행 사진을 훑어본다. 꿈만 같다. 아주 기분 좋은 긴 꿈이었다. 순례가 내 일상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25일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선한 다짐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 스콜라스티카 수도원 회랑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지하 경당

 
이탈리아와 독일의 여러 수도원을 다녀오며 작은 소망의 불꽃이 타오른다. 무엇보다도 기도가 깊어졌으면 좋겠다. 예전에 기도는 힘을 써야 하고 시간을 내야 하며 마음을 쏟아야 하는 고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젠 기도 안 하는 것이 기도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의식이 깨어 있는 모든 순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의 영과 친밀한 사귐이 더 깊어졌으면 좋겠다. 들숨과 날숨의 무한 반복으로 생명이 유지되듯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영적 들숨과 날숨을 무한 반복하여 영혼이 매 순간 깨어 있었으면 좋겠다. 내 육에 머물러 고착된 인생은 너무 고되다. 영과 연합되어 그분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그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사는 삶이고 싶다.

독일 에탈수도원

 
성령님께서 내 안에 내주하시게 되고, 내 마음의 안방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겸허히 물러나면 마음이 안정된다. 안정된 마음이 되어야 일상에 대한 열정이 생기고, 일에 대한 풍성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온다. 삶이 즐거워지게 된다. ‘기도하고 노동하라’(ORA ET RABORA) 이 둘이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탈리아, 스콜라스티카 수도원

 
‘말’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혀와 입과 마음과 성격이 연합하여 ‘말’을 만든다. 때론 내 말에 내가 흐뭇하다. 때론 성령께서 내 말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때론 헛되고 쓸모없는 말을 쏟아내어, 그 말로 누군가를 베고 찌른다. 내 의지로 내 혀가 통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지로는 안되겠지만, 매일 매 순간 반복훈련을 하면 아주 조금은 나아질 것이다.
 

적게
천천히
부드럽게

 
나이가 들수록 얼굴이 맑아졌으면 좋겠다.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에서 만난 80대 수도사님들 중, 키가 작고 머리숱이 많으며 수도원 입구 안내실에 앉아계신 수사님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숙소에서 나와 인사할 때, 다가가서 사진 한번 찍자고 하지 못한 게 좀 후회된다. 그분이 작은 전동기계를 타고 이동하시는 모습을 우연히 찍긴 했다. 얼굴은 영혼의 창이다. 얼굴을 통해 영혼의 모양을 알 수 있다. 얼굴엔 빛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 우리 영혼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내 영혼이 그 빛을 반영하면 얼굴에 빛이 난다. 해맑아진다. 미세한 근육들이 아름다움을 자아내게 한다. 내 꿈이다. 나이가 들수록 얼굴이 맑아지는 것이다. 그 수사님처럼.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

 
 
아직 꿈이 다 깨지 않은 모양이다. 그냥 그 꿈에 머물고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젠 일상 순례자로 살아야 할 때다. 여기가 내 선교지다. 이곳에서 나는 순명한다. 이곳에서 나는 시대와 문화의 힘을 거슬러 청빈과 순결을 다짐한다.

이탈리아 수비아코 순례길

 

성 베네딕도의 기도

제게 혹시 선한 것이 있다면 당신께 돌리고,
제게 있는 악은 제 자신에게 돌리기를,
영적인 갈망으로 영원한 생명을 열망하며,
매일 죽음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살며,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살피고,
당신께서 어디서나 저를 지켜보고 계심을 기억하며,
마음에 일어나는 악한 생각을 쫓아내고,
혀를 지켜 사악한 말을 하지 않으며,
많은 말을 피하고, 허튼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똑똑해 보이려고 말하지 않으며, 좋은 글을 골라 읽으며,
자주 기도하고, 제 죄에 대해 매일 용서를 구하며,
제 생활을 고칠 방법을 찾으며...
거룩해 보이기보다는 거룩해지는 것을 구하고,
선한 일로 당신의 계명을 완성하며,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으며,
싸움을 멀리하고 교만을 싫어하며,
적을 위해 기도하며, 해가 지기 전에 화해하며,
당신의 자비에 기대어 결코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이렇게 살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