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교구 소식지 3호. 2015/10/04


요셉은 우리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까?

 

20대 시절, 불현 듯 의문이 생겼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랑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너무 믿음이 좋았고, 너무 영웅적이고, 너무 영화적이었다. 나는 의심도 많고, 근심걱정도 많고, 분노할 때도 종종 있는데, 성경 인물들은 죄다 영적 거장들이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거물들이었다. 특히 요셉이 그랬다.

 

요셉은 17살 때 배다른 형제들의 질투 때문에 이집트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됐다. 이집트 경호대장 보디발의 가정총무가 되어 금세 인정받았지만, 이내 주인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결과 강간미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흔들리지 않았다. 남 탓하지도 않았다.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았다. 나 같았으면 하나님을 향해 이럴 수 있느냐며 항변도 했을 일인데, 요셉은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요셉은 내게 너무 먼 당신이 됐다.

 

요셉이 이집트 총리가 되었을 때의 나이보다도 훨씬 더 나이를 먹게 된 어느 날, 성경 구절 하나가 눈에 꽂혔다. 시편 10518절이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 사실에 매였으니요셉의 생애에 관한 핵심 요약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기근을 대비해서 요셉을 이집트에 먼저 보내셨고, 그를 단련하셨으며, 때가 되어 요셉을 이집트의 주관자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18절에 있는 이라는 단어에 2)라는 각주가 달려 있는데, 성경 아래에 보니 ‘2) , 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또 다른 자료를 뒤적여보니 중세 라틴어 성경 번역본 벌게이트(Vulgata)에서는 이 구절을 쇠가 그 영혼에 파고들었다라고 번역해 두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요셉의 몸을 매고 있었던 쇠사슬은 실은 요셉의 영혼을 옭죄고 있었고, 요셉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고 보는 추론이다. 충분히 일리 있는 설명이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요셉, 그는 그 속에서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자신이 꾼 꿈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좌절했을까? 이 흑암과 절망의 시간,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은 그 시공간의 감옥 속에서 무엇을 소망하며 버텼을까? 기다리고 기다려도 끝내 변하지 않는 그의 처지 때문에 무기력해지지 않았을까? 그랬을 것이다. 분명 요셉은 눈물로 밤을 지냈을 것이고, 분노도 치솟아 올랐을 것이고,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이렇게 상상해보니 요셉의 결과가 사뭇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19절이 이렇게 기록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에게는 언제까지 기다림의 감옥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라고 바꾸어 주셨다. 요셉에게는 쇠가 영혼을 파고드는 고통의 시간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단련으로 담금질해주셨다.

 

꿈이 지연되고 기대가 무너져서 기다림에 지쳐 밤 잠 설치는 것은 20대의 특권 아닐까 싶다. 그때 혹여 요셉도 나처럼 기다리다 지치고 두려움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그 요셉을 하나님의 집의 주관자로 삼으셨으니, 그대들과 나도 그렇게 사용하심이 마땅한 일 아닐까?

 


Posted by 신의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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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교구 소식지 2호. 2015/09/20


권찰(勸察)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청년부 소그룹 이름이 구역인 것도 조금 촌스러웠는데, 구역장을 도와 구역을 섬기는 청년 리더를 가리켜 권찰이라 부르니 말이다. 사전을 찾아봤다.

: 권할 권 / : 살필 찰

권찰 : [기독] 장로교에서, 신자의 가정 형편을 살피고 찾아가서 만나 보는 직무. 또는 그 일을 하는 사람.

 

곰곰이 뜻을 음미하다 보니 한 사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우리 어머님이다. 어머님께서 권찰이라는 직분을 섬겼던 내 어린 시절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구역 식구들 집을 자주 들락거리셨다. 혼자 계시는 어르신에게 쌀을 갖다 드리기도 하고, 누구 누가 아프다 하면 늦은 밤 홀로 부엌에서 중얼중얼 기도하곤 하셨다. 구역장 직분을 맡고나서는 젊은 새댁을 데리고 다니며 권찰이 해야 할 일을 몸소 보여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데 옛날식 직분이라고 생각했던 그 권찰을 우리 20대청년들이 맡고 있다. 권찰을 맡은 청년들도 호칭 때문에 나처럼 피식 웃었다고 한다.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좀 어울리는 호칭 없을까 궁리도 해봤지만, 성도들의 마음 안팎의 형편을 살피고 권하는 권찰만큼 더 좋은 이름이 없는 것 같아 그냥 그대로 쓰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권찰 호칭에 애착이 간다.

 

우리 21교구에는 12개 구역, 16명의 권찰이 있다. 어쩌다 내 눈에 띄거나 구역에서 추천을 받아 권찰이라는 직분을 맡아 섬기게 되었다. 나는 이들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격주로 만난다. 기도제목을 나눌 때도 있고, 찬양을 부른 적도 있다. 책을 읽고 나누기도 하며, 때론 삼삼오오 따로 만나 더 속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다. 권찰들에게는 우리 집 거실에 앉을 수 있는 특권도 누릴 수 있게 해준다.(^^;) 실은 내가 하는 사역 중에 제일 애정을 가지고 마음 쏟는 분야가 권찰모임이다. 권찰들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권찰들은 더 많은 시간을 공동체에 쏟아야 하고, 교구 전체 행사를 비롯해 교회 행사에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없으면 재미없고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그 어느 자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권찰들이 이미 다 알고는 있겠지만, 꼭 기억해줬으면 하는 게 하나 있다. 권찰이 영적으로 깨어 그 직무에 충실하면 그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나라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 안에 머문 지체들이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영적 공동체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힘을 내시라. 그대들로 인해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희락과 화평의 하나님나라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고, 척박한 현실을 함께 걷는 동무들이 거기서 쉼을 얻을 것이다. 사무실에 앉아 글을 갈무리하며 우리 권찰들을 향해 축복의 노래 하나 불러본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메마른 땅에 샘물 나게 하시기를, 가난한 영혼 목마른 영혼 당신을 통해 주 사랑 알기 원하네

 


Posted by 신의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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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꽃나루사람들 2014년 11월호 원고


삶의 이정표가 되었던 책

 

나에게 좋은 것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이 꼭 좋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간청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책을 잘 추천하지 않는 편이다. 나에게 있어서 책을 추천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내면과 됨됨이와 세계관을 고스란히 열어 보여주는 것과 같다. 내 신앙 여정에 작은 이정표가 됐던 책들이 진리의 길을 찾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희망하며, 책 몇 권을 추천해 본다.

 

이현주, <예수와 만난 사람들>(생활성서사)

이 책은 성경 읽기의 발상을 전복시킨다. 그가 소개하는 예수는 긴 금발머리와 조각 같은 외모에 카리스마 작렬하는 미남 영화배우와 거리가 멀다.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 의해 매끈하게 다듬어진 메시야 예수도 아니다. 저자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직접 갈릴리 현장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거기서 우리처럼 피로를 느끼고 땀도 흘리며 완벽한 한 사람으로 사셨던 예수님을 만나게 한다. 저자 자신의 해석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지만, 복음서를 이런 식으로 읽는다면 필경 우리는 이 땅에 사셨던 예수님을 더 가까이 느끼게 될 것이다.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샘터)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너무나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자주 무시되는 질문들이다.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속 시원한 답을 얻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논리적으로 풀어가되 명료한 문장으로 이끌고, 복음으로 답을 제시하되 충분히 설득가능한 논리로 변증할 수 있는 이는 한국 교계에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품격 있게 그러나 복음의 논리로 풀어낼 수 있는 최고의 기독지성은 손봉호 교수일 것이다. 교회로부터 보다 합리적인 대답을 구하는 지적인 구도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헨리 나우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두란노)

한국 개신교 안에 카톨릭 사제인 헨리 나우웬 열풍은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른다. 다 이유가 있는 법 아닌가. 생수의 강으로 인도하는 그의 아포리즘은 영적인 삶을 갈구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하나씩은 마음에 새겨 놓았으리라.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작정한 이래로 제자의 길 위에서 잠시나마 마음의 갈피를 못 잡을 때면 나는 늘 그의 이 문구를 생각한다. “하향성은 신적인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길이다.” 인생의 방향성 좌표 설정이 필요한 이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정언명령들이 책 지면에 가득 채워져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대한기독교서회)

공동체’, 참 가슴 벅차오르게 만드는 단어이다. 동시에 상처와 좌절을 안겨주는 단어이기도 하다. 신자가 되는 순간, 우리는 자동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교회 공동체와 운명을 같이 한다. 그러나 결코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나라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공동체는 애증의 용어가 되어 버리곤 한다. 공동체를 사랑해서 마음 아파본 경험이 있다면 본회퍼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라. 그는 내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해선 내 꿈이 산산조각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가히 이 책은 교회 공동체 대한 나의 바이블과 같다.

 

스캇 펙, <거짓의 사람들>(비전과리더십),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포이에마)

천국이라는 주제는 우리의 영원한 관심사이면서도 명증하게 풀리지 않는 신비의 영역이다. 외면하고 살자니 삶이 자꾸 그 주제들을 연상시키고, 알려고 달려들면 더욱 멀리 달아나 버린다. 스캇 펙은 천재다. 그의 글은 의 몸서리치는 실체를 경험하게 하고, 별로 기대가 안 되는 천국을 향한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한 번 잡으면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결코 손을 놓을 수 없는 책이 있는데, 스캇 펙의 두 권의 책이 그런 책이다. 지옥도 경험해 보고 천국도 경험해 보시라. 단 우리의 짧은 신학 지식으로 재단하지는 말자.

존 스토트, <제자도>(IVP)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아니 이 책의 저자를 몹시도 사랑한다. 그분의 미소 머금은 사진은 내 마음의 명예의 전당에 영원히 걸려있고, 그분이 별세한 2011727, 종일 눈물이 났다. 그분이 88세에 쓰신 마지막 저술은 자신의 신학과 인생과 목회를 간명하게 정리한 책이다. 거기서 그분은 이런 말을 썼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 모두의 소망 아닌가.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 아닌가

Posted by 신의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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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통 2015년 10월


, 어렵다! 정직

 

오늘 하루 정직해지기로 마음먹어 봅니다. 몇 시간이나 됐을까요? 결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 언사를 곰곰이 되새겨보니 그 몇 마디 문장 속에 거짓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한 과거의 일을 옮기면서 나를 과대 포장하고 싶은 과장이 발생합니다. 내가 한 일을 지적하는 상대방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다가 은근히 내 잘못을 감추는 축소가 발생합니다. 남이 한 말을 마치 내가 한 것인 양 도용도 서슴치 않고,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칭찬할 때 침묵으로 타인이 받아야 할 칭찬을 도둑질합니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정직하기로 한 결심이 무너집니다. 내 입으로 쏟아내는 말마다 거짓이 묻어 있습니다.

 

아니,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고 인정하는 게 그리 어려운가?’, ‘도대체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거짓말을 하는가?’ 스스로를 탓하고 되돌아봅니다만, 저는 내일 또 수 만 가지 상황에서 교묘한 방식으로 정직하기로 한 제 결심을 무너뜨릴 것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이 고백조차 부정직한 제 자신의 교묘한 자기보호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이 글을 보면서 아하, 목사님은 정직을 위해 매일 분투하는구나라고 생각하도록 유도하면서, 실상 저는 결코 정직한 사람의 경지에 이르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정직이 어려운 일일까?’ 곰곰이, 곰곰이,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인정받고 싶은 자아가 아직도 펄펄 살아서 제 영혼의 주인이 되려고 하나 봅니다. 제 자존심을 지키고 보호하면 안전할 것이라고 여기는 거짓 목소리가 제 안에서 끊임없이 거짓말을 부추기나 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 내면의 전쟁, 그러니까 민낯을 숨기거나 포장하거나 화장하지 않고 인정하고 드러내려는 분투가 여전히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직한 자아를 위한 투쟁이 없다면,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정직 문제도, 공적 영역에서의 정직 문제도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실패할지라도, 또 변명할지라도, 저는 내일도 정직하기로 마음먹을 생각입니다. 그게 정직을 대하는 저의 정직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신의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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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교구 소식지 1호. 2015/09/13


있는 모습 그대로

 

내 나이 마흔넷이다. 우리나라 남성의 현재 기대수명이 78.5(201412월발표)라고 하니 반환점을 돈 셈이다. 요샌 죽는 게 그다지 두렵지가 않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더 짧아져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 마흔 즈음부터 세월의 속도가 제트엔진을 단 듯하다. 1년이 짧게 느껴지니 말이다. 그런데 시간의 속도와 성숙의 속도는 반례비하나 보다. 성장의 대한 마음의 몸부림보다 안주에 대한 몸의 욕구가 더 커졌다. 20대 때 쓴 일기, 30대 때 쓴 설교문을 간혹 다시 읽어보면 놀라움의 연속이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깊고 넓다. 굳이 내 글을 봐서만이 아니다. 20대 청년들과 대화하다보면 그냥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참 많다. 30대 교역자들과 논의하다보면 일하는 것부터 사람 대하는 것과 설교까지 다 배워야 할 것 투성이다. 그러다보니 상담도 조언도 설교도 자신 없어질 때가 있다. 다 나보다 더 잘 알고 더 잘 하는 것 같은데, 내가 해 줄 말이 뭐가 있나 싶어서이다.

 

지난 8월 피정[避靜]기간에 6학년 된 둘째 아들과 함께 지리산을 다녀왔다. 늦은밤 용산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이른 새벽에 지리산에 도착해서 성삼재에서부터 천왕봉까지 걷는 23일의 긴 산행이었다. 아들이 잘 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을 했지만 그건 기우[杞憂]였다. 아들이 나보다 훨씬 더 잘 걸었고, 아비가 아들 염려하는 것보다 아들이 아비 염려를 더 속깊이 했다. 다녀온 후 아들의 기행문을 읽어보니 나보다 깨달은 것도 훨씬 더 많고 깊더라.

 

몸의 나이가 응당 통과하는 시기를 지나는 것일까. 아니면 내 영혼이 마른 황야를 지나는 것일까. 어딘가 잇대어 젊음의 물줄기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어졌다. 이 땅의 지식이 아니라, 하늘의 지혜를 담아내는 언어를 배우고 싶어졌다. 뭔가를 세우는 데 정력을 쏟아내기보다는 잘 건설된 공동체에 기대고 싶어졌다. 뭘 줘야 한다는 압력으로부터 해방되어 투명하고 진솔하게 사람살이에 공감하고 싶어졌다. 어쩌다가 오래된 낡은 LP판 같은 주보를 만들게 됐다. 그냥 서로 잇대어 보려고 하다보면 어느덧 성령님 안에 우리가 있음을 문득 깨달을 수 있으려나!

 

21교구 젊은이들이 만들어내는 첫 주보인데, 청년들에게 줄 청량감 뿜어내는 아이디어가 없어 고심하다 그냥 지금의 있는 모습 그대로의 민낯을 글로 찍어 보았다. 이게 나다. 그런데 이런 나도 참 괜찮은 듯싶다.

 

 

Posted by 신의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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