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기고/시니어매일성경

천국을 향한 기다림

신의피리 2025. 2. 20. 23:10

시니어매일성경 2025년 3-4월호 기고


 

잠들다 죽는 게 가장 큰 은혜

 

삶 저 너머 영원에 속한 무언가가 순식간에 여기 일상으로 넘어와 번쩍일 때가 있다.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뚫고 기쁨이라는 유전이 솟구치며 터져 나오는 순간이다. 20186월의 싱그러운 어느 날, 7, 80대 어르신들 여덟 분을 모시고 교회에서 나들이를 갔었다. 숲속 나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일상과 영원이 잇대어지며 기쁨이 솟구치는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다.

이우교회 시니어나들이, 2018년 6월, 내대지238

 

나이를 먹으니까, 귀가 안 들려. 근데 그거 좋은 거야. 그 권사는 너무 잘 들려서 괴롭대. 좀 안 들어도 되는 것까지 자세하게 다 들린대. 난 잘 안 들리니 얼마나 좋아~”

늙으면 죽어야 하는데,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돼. 어떤 양반은 죽으려고 밥을 굶었대. 근데 배가 고파 못 죽겠대.”

우리한테 어디 아픈 데 없어요?’라고 묻는 거 잘못됐어. ‘어디 성한 데 없어요?’라고 물어야 해. 안 아픈 사람이 어딨어? 안 아픈 데가 없어!”

우리 집 양반은 새벽 2시면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봐. 잠이 안 온대. 그리고 노인정도 안 가. 가면 맨날 남 헐뜯는 얘기만 해서 싫대.”

 

40대 중반이었던 나는 어르신들의 대화를 듣다가 킥킥거리며 웃다가 울었다. 죽음을 친구처럼 여기고 계신 어르신들의 초연함과 유머가 아름답고도 슬프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80여 년을 살며 건져 올린 지혜의 각축전은 재밌었으나, 잠들다 죽는 게 가장 큰 은혜라는 말로 만장일치를 보는 순간은 숙연했다. 그러나 뭔가 알 수 없는 기쁨이 모두를 감싸고 있었다.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날의 아름다운 대화에 참여했던 어르신 중 절반 이상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어느 것 하나 예측대로 된 것이 없다. 천국을 향한 마지막 여정은 태어난 순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갈 준비가 된 사람부터 부름을 받지도 못했다. 순서는 종잡을 수 없었고, 모두의 소원대로 잠들다 천국 간 분들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천형(天刑)으로서의 목사직

 

목사직이 천형(天刑)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목회자로서 교인의 임종 순간을 지키고, 장례 과정을 예배 가운데 인도할 때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에 피가 스며들 듯 괴로이 기도하시던 주님의 심정을 잠시나마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죽음의 공포와 이별의 슬픔에 영혼이 압도당하고 암담함 때문에 존재는 천근만근 무겁다. 더 힘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목사인 나는 이 감정에 오롯이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천국을 향한 소망과 부활을 향한 믿음에 힘입어 가족과 교우들보다 한 걸음 앞서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가져온 슬픔에서 생명을 향한 소망으로 분위기와 생각을 전환시켜야 하는 기적 같은 힘이 필요하다. 영원의 영역에서 빌린 힘이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나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다.

 

나는 서른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딱 사십여 일 아프고 아무 작별 인사도 없이 숨을 거두셨다. 떠나는 아버지도 남은 가족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심정은 알 길이 없으나, 내 심정은 세월이 흘러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고 자세하게 기억할 수 있다. 슬픔의 거대한 파고 뒤엔 죄책감의 더 큰 쓰나미가 덮쳐 왔고, 내가 알고 있는 신학 지식과 기도로 쌓아 올린 신앙심은 허망하게 다 쓸려가고 말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야만 했다. 오랫동안 섬겼던 교회를 떠나 삶을 재건하려 애쓰던 시기에, 스캇 펙(Scott Peck)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이라는 희한한 책이 내 손으로 들어왔다.

스캇 펙,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암으로 투병 중인 아들을 둔 저는 이 책을 읽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그의 책은 하늘이 내린 선물입니다.” (아마존 독자 리뷰)

 

책 표지 하단에 있는 독자 리뷰가 시선을 끌었을 수도 있다. 책 제목도 한몫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책을 펼치는 순간 나는 마법같이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책은 저명한 정신과 의사가 쓴 소설이다. 그는 사후세계에 관한 임사체험 보고서와 인지심리학, 그리고 신학과 상상력을 버무려 흥미진진한 소설을 완성했다. 소설은 자전적 형식을 띠는데, 주인공은 실제 저자와 마찬가지로 정신과 의사이며, 73세에 폐암으로 죽는다. 이야기는 그 죽음 직후에서 시작한다. 그의 영혼은 죽은 몸과 분리된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러자 어두운 터널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이후 캄캄한 터널을 지나 빛으로 나아간 후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그때 자신의 전 생애가 영상처럼 눈앞에 스쳐가고 빛 속에서 전적으로 수용되고 있음을 느낀다. 일종의 신고식 같은 것이 끝난 후, 주인공은 본격적으로 사후세계를 배워나간다.

 

중간에 멈추지 않고 단숨에 읽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긴 여운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기쁘고 평안했다. 천국을 향한 소망이라는 것의 실체를 내 현존 안에서 완벽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책은 상상력에 근거한 소설에 불과하지만, 나는 천국이 실재하는 곳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목격한 것 같았고, 체험한 이가 들려주는 이야기 같았다.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국은 소설이 묘사한 바와 온전히 같을 수 없고 또한 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으로 천국이 실재처럼 느껴졌고, 여기 이곳의 삶보다 더 좋은 곳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어서 빨리 가보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나라는 한 존재가 그 어떤 방해와 제약 없이 완전하게 꽃피울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내가 죽고 난 다음에 펼쳐진다면 왜 아니 가고 싶겠는가. C. S. 루이스(C. S. Lewis)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천국을 실재하는 곳으로 묘사했는데, 실재하는 천국에서 생성된 뭔가가 소설을 통해 현세에 갇힌 내 마음으로 주입된 것이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천국으로의 초대를 막을 수 없었다. 천국에서 생성된 것이 분명한 기쁨이라는 정서한 줄기가 메마른 마음을 뚫고 펑 하고 솟구쳤다.

c.s.루이스, <천국과 지옥의 이혼>

 

그러자 불현듯 돌아가신 아버지가 내 곁에 왔다 가셨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기력에 빠진 내 모습을 보고 평소처럼 말없이 안타까워하시다, 내가 다시 힘내는 걸 보고 안도하시며 다시 천국의 여정을 이어가셨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날로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갔다. 막연하기만 했던 미래의 천국이 생생한 실재이며, 그 실재에서 떨어져 나온 손에 잡힐만한 생명으로 내 마음에 심어진 것이다. 내 영혼으로 들어온 천국에 대한 믿음, 그곳을 향한 소망은 이제 그 무엇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 도리어 천국이 가슴에 사무친다. 죽음이란 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지으신 하늘의 장막으로 이사를 가는 일일뿐이다. 이러한 이동은 분명 실재할 것이다. 내가 갈 그 세계도 실재할 것이다. 때때로 목사직이 천형(天刑)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나는 절대로 절망에 빠질 수 없고, 슬픔에 압도당하지 않으며,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절대 낙심하지 않는다(고후 4:16).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어르신들과 나들이를 다녀온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그 일이 시작됐다. 여덟 분의 어르신 중 두 번째로 어렸던 권사님부터 천국을 향한 이사가 시작됐다. 말기암 진단을 받은 날로부터 6개월간 나는 매주 한 번씩 권사님 댁을 찾았다. 삶에 대한 애착과 죽음 그 너머를 향한 소망 사이에서 권사님은 아름답게 분투하셨다. 마침 몇 달 전 내가 먼저 읽고 권사님께 빌려드린 미치 앨봄(Mitch Albom)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때문인지, 매주 만나는 일은 찬란한 슬픔의 역설이 지배하는 순간들이었다. 그사이 수술과 항암치료가 한 번씩 있었으나 나아지지 않자 권사님은 천국을 향한 여정의 마지막 거처로 옮기셨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자, 권사님의 몸은 빠르게 쇠잔해졌다. 그러나 얼굴빛은 늘 밝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방문했을 때, 평소와 달리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 보였다. 평소와 같이 시편 23편을 읽고 기도를 마쳤을 때 권사님께서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목사님, 하나님이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으세요? 왜 그러신 거예요?”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목사로서 당당하게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 수치스러워서 내 무의식이 일부러 기억을 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횡설수설했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느니, 하나님께서 권사님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느니 등등 경우에 맞지 않는 공허한 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기에 더욱 당황했다. 죄인 된 심정으로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실을 나왔던 것만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런데 그날 저녁, 권사님의 가족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병실을 나간 후, 갑자기 권사님이 가족들을 다 부르시더라는 것이다. 그러시더니 곁에 있는 여동생의 손에 키스하고, 둘째 며느리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더라는 것이다. 내내 말씀이 없으시던 분이 갑자기 밝아지셔서 이상하다며 연락이 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내 횡설수설을 성령님께서 진리와 생명의 메시지로 바꾸셔서 권사님의 질문에 응답이 되게 하셨으리라. 권사님은 천국의 호출을 받아들였고, 조금 이른 감이 없잖은 생애에 감사했으리라. 다음 날 새벽부터 권사님은 서서히 호흡이 거칠어지셨고, 호출을 받은 나도 권사님의 마지막 임종의 시간을 곁에서 함께했다. 6개월간 매주 읽었던 시편 23편을 읽어드린 후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실재하는 천국을 향한 여정이 곧 시작될 것인데, 기대하시라고, 두려워 마시라고 말씀을 드렸다. 머잖아 나도 가게 되거든 꼭 인사드리겠다고 했다.

 

내가 처음 죽음의 순간을 목격한 것은 가까운 친척의 임종이었다. 호흡이 매우 거칠었고 가끔 소리를 지르셨다. 흡사 톨스토이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묘사한 그 죽음의 모습과 유사해 보였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의 억울함과 저항은 곁에 선 이들에겐 . . .’로만 들릴 뿐이었고, 보고 듣는 이들이 모두 괴로울 뿐인 괴성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호흡은 그와 다르다. 억울함과 저항의 격정일 리가 없다. 도리어 감사와 소망의 편안함일 수밖에 없다. 나는 권사님의 마지막 호흡이 감사가 되고 소망이 되고 찬송이 되길 원했고, 분명 편안하게 작아지고 줄어드는 생명의 호흡이었다.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5-26)를 이렇게 해석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들이기에 우리 몸이 죽을 때 진정 우리 생명이 죽는 게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잠이 든 이후, 천국에서 깨어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성도는 나 죽는다하면서 괴로이 죽지 않는다. 마지막 힘을 다해 숨을 내뱉은 후, 영혼은 천국에서 생명의 숨을 들이마시며 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모두 잠자는 중에 천국으로 갈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거실에서 놀다 잠들면 부모가 안아서 제 방 침대에 옮겨 놓게 되고, 아침에 깬 아이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옮겨졌는지 전혀 모르듯이, 우리의 죽음은 그렇게 될 것이다.

 

천국을 향한 기다림

 

죽음을 묵상하는 것은 삶에 유익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인생 말년에 긴 인생을 반추하며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2). 남은 날을 헤아릴 줄 아는 이는 현재를 허투루 살지 않는다. 공허를 달래기 위해 헛된 것에 중독되도록 자신의 자아를 쉽게 내주지 않는다. 오늘이라는 하루를 맞이할 때마다 영원과 잇대어지는 작은 순간들을 사랑한다. 곳곳에 널려 있는 기쁨을 발견하는 것만큼 만족스러운 것은 없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의 시작이기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평생을 벼랑 끝에 선 이들과 상담하며, ‘중독자기 보호라는 죄의 감옥에서 해방되도록 돕는 역할을 해온 기독교 상담가 래리 크랩(Larry Crabb)은 말년에 자주 물었다. “하늘나라가 정말 있을까,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왜 하늘나라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하늘나라를 마음 맨 앞자리에 두고 살지 못할까?” 그는 지난 삶을 돌아보고 남은 삶을 계수하며 마지막 책을 썼다. 천국을 향한 기다림: 잊혀진 그리스도인의 소망. 책 제목이 그의 생각을 보여준다. 어쩌면 인생은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 사이를 걷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의 땅을 향한 기다림 속에서 하루하루 주어진 분량의 길을 함께 걷는 것이 모세의 인생이었듯이, 우리의 인생 또한 천국을 향한 기다림 속에서 오늘이라는 분량의 하룻길을 함께 걷는 것이리라. 그때 우리는 일상에서 또다시 영원과 잇대어지는 순간들을 만날 것이고, 삶 건너편에 속한 기쁨이 번쩍이면서 이쪽 내 삶에서 솟구칠 것이다.

래리 크랩, <천국을 향한 기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