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기고/QTzine

지금 무릎을 꿇으라

신의피리 2015. 5. 25. 23:11

QTzine [2005/07] 

김종필 편집장 qtman@young2080.com


 

저는 철학을 전공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논리적 사고, 합리적 유추, 비판적 관점을 무엇보다 중시여기는 풍토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 선배는 후배들에게 “왜 그런가?”를 삶의 모토로 삼아야 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는데, 저는 선배들의 그런 사고의 습관을 수용하면 수용할수록 무언가가 퇴화되고 있음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기도였습니다. 예전엔 일상 속에서 언제든 주께 묻고 듣고 간구하고 응답받는 일이 자연스러웠는데, ‘의심’하는 습관이 생기면서부터는 그게 잘 안되더라는 것이죠.


물론 모든 기독인 철학도가 다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만, 저는 유달리 뜨겁게 기도하던 기독인들을 향해 냉소의 시선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저는 그 시절부터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란 말을 무척이나 좋아하게 되었지요. 그렇지만 조목조목 따져본다거나, 성경을 읽는 상상력이 풍성해졌다거나, 부당한 권위나 제도에 눈뜨게 되었다거나 하는 점에선 분명 발전한 듯한데, 여전히 늘 2%의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막상 기도하려고 하면 수만 가지 환상을 쫓아내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느니 조용히 사색하는 게 훨씬 편했죠. 그리고 어쩌다 합심중보기도라도 하게 되면 ‘기도가 중요한가 실천이 중요하지’라는 생각 때문에, 또는 너무 크게 기도하는 주변 사람들 핑계로 쉽게 포기하는 습관도 들어버렸구요. 기도의 응답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의 말들도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냥 그렇게 된 걸 가지고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하는 것도 우스웠고, 모든 걸 너무 쉽게 ‘기도와 말씀’으로 귀결시키려는 것도 못마땅했습니다.


기도에 대해 좀 안다고 했는데 실상은 기도에 관한 ‘지식’일 뿐, 기도의 ‘능력’은 아니란 걸 알게 된 어느날, 덜컹 겁이 났습니다. 기도하는 삶이 아니고서는 삶이 피폐해져갈 수밖에 없음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관해’ 묵상하다가 불현듯 마음속에 강력한 메시지가 울렸습니다. “야~ 지겹다. 이제 ‘생각’ 좀 그만하고, 무릎을 꿇어라” 허겁지겁 자판 두드리기를 멈추고,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입을 열었습니다.


“주님, 주의 영 안(롬 8:5-6)에 있길 원합니다. 불경한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