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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19] 4월엔 가파도에서 청보리밭을 거닐어야 한다

신의피리 2024. 4. 19. 19:19

드디어 가파도다. 4월 제주는 청보리 축제가 열리는 가파도에 가야 한다. 날씨가 맑으면 금상첨화다. 주초부터 수시로 날씨를 체크하며 예매 사이트를 들락거린다. 항상 매진이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또 들어간다. 역시! 엊그제 아침 묵상을 마치고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니 금요일 마지막 타임에 한자리가 나왔다. 성인 1명! 날씨 맑음! 나를 위한 초대장 아닌가!

너무 설렛나 보다. 웬만해선 그런 일이 없는데, 시간을 착각해서 1시간이나 일찍 간 것이다. 30분 일찍 가는 습관이 있으니. 1시간 30분 일찍 간 셈이다. 출발 40분 전에 반드시 와야 한다고 하니, 총 2시간 10분 일찍 도착이다. 3시 50분 출발인데 1시 40분에 도착했다. 

배 승선 30분 전부터 줄을 선다. 내 바로 뒤에 60대 초반 부부가 말다툼을 하는 게 계속 거슬린다. 아니, 남자의 일방적 공격이다. 듣고 싶지 않으나 너무 큰 목소리여서 또렷하게 대화가 들린다. 남자가 화가 난 이유는 여자가 예매 시간을 착각해서 30분 늦게 예매가 된 모양이다. 다음 여행 시간이 꼬여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아내의 섬세하지 못한 성격을 탓하는 듯하다. 그런데 똑같은 내용으로 20분 넘게 타박한다. 세상에 그렇게 쫀쫀할 수가 없다. 그 잔소리를 가만 듣기만 하는 여인은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은 것일까. 아니면 남들 시선 때문에 참는 것일까. 아니면 가스라이팅 당하는 걸까. 그렇게 작은 일로 왜 맞대응하지 못하는 걸까?

 

‘여보슈! 쪼잔하게시리! 30분 늦은 걸 가지고 그렇게 불평 하슈? 그만 좀 하시오! 진짜 창피하군!’ 열불이 나서 몇 번이나 속으로 분노를 삼긴다. 

가파도 들어가는 배

 

가파도에 도착해서 하선하자마자 모두들 자전거를 탄다. 남들 다 하면 나는 절대 안 한다. 다들 자전거를 타면서 섬을 한 바퀴 돈다. 그러나 나는 혼자 걷는다. 좋다.

가파도 자전거 길

 
청보리 밭으로 올라간다. 가파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키가 작은 섬이란다. 그러니까 올라갈 곳이 없다는 말이다. 섬 중앙에 드넓은 청보리밭이 펼쳐진다. 상상으로만 그리던 그 장면이다. 


강아지처럼 좋아서 폴짝 거리며 뛰는데 어제 느꼈던 감정이 또 올라온다. 찬란하게 아름답건만 슬픔의 감정도 함께 묻어온다. 그 순간 아내에게서 페이스타임 전화가 온다. 아름다움은 배가 되고, 슬픔은 줄어든다. 이 멋진 장면을 보여 주니, 아내는 풍광보다 내가 더 보고 싶다 말한다.

 

찬란한 슬픔은 형용모순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형용모순이라는 모호함 이면에 숨어 있기 마련이다. 신비인 것이다. 너무 쉽게 답이 나오는 논리적 결론은 왜곡되었거나 진리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홀로 제주 한달 살이 하면서 종종 느끼는 이 '찬란한 슬픔',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건 내게 좋은 일이다.

 

마음에 평화가 오니 친절이 철철 넘친다. 엄마와 아들 사진만 연신 찍어주는 젊은 아빠에게 다다가 사진을 찍어주겠다 하니 너무 좋아한다. 예닐곱 명 되는 60대 남녀분들이 삼각대를 힘겹게 세워두고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잘 안되나 보다. 잔소리들이 많아질 때 가서 사진사를 자청한다. 나보고 작가냐고 묻는다. 기분 좋으니 더 열심을 내서 찍어준다. 여러 포즈를 찍어주고 돌아서는데 한 분이 큰 소리로 외친다. 

”젊은이! 복 받으시오!”

분명 나보고 젊은이라고 했다. 그래, 60대가 보기에 50대 초반인 나는 젊은이가 맞다. 나이는 상대적일 수 있다. 여하튼 그분이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일 수도 있고, 시력이 무척 나쁘거나, 한 잔 걸쳐서 그랬을 수도 있다. 암튼 젊은이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잠시잠깐 30대로 돌아간다. 기분 좋다. 

 

모든 순간이 다 아름답게 느껴진다. 젊어서 이렇게 홀로 여행을 종종 했었어야 했는데 뒤늦게 한다고 자기 자신을 탓했다. 그런데 젊은이라는 말을 들으니 다 해소된다. 해가 진다. 돌아갈 시간이다. 가파도에서 짜장면을 먹었으면 했는데, 시간이 부족했다. 버스 정류장 근처 모슬포항에 짜장면 집이 보인다. 그냥 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