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책에서 만난 문장

<영적 가면을 벗어라>, 래리 크랩

신의피리 2024. 7. 19. 18:19

1997년, 2010년, 2024년 판

 

지금의 나를 나되게 만드는 데 영향을 끼친 책 10권을 꼽으라고 하면, 그중의 하나가 래리 크랩의 <영적 가면을 벗어라>일 것이다. 대학 졸업할 즈음에 초판을 읽었고, 목회자가 되어 청년들을 지도할 때 재판을 읽었다. 두 번째 읽고 나서는 몇몇 청년들을 데리고 북스터디도 했었는데, 원성이 자자했다. 삶이 힘든데 이렇게까지 힘든 책을 읽어야 되겠느냐, 이렇게 힘들게 하는 책을 목회자가 추천해도 되느냐는 원성이었다. 

 

그 사이에 래리 크랩의 책들은 계속 출간되었다. 나는 한 두권을 더 읽었으나 다는 읽지 못했다. 목회자의 필독서들을 읽느라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책이 나오는 족족 책을 읽었다. 아니 거의 뜯어먹는 수준이었다. 읽고 소화를 했고, 점점 래리 크랩화 되었다. 오래전 만든 블로그 이름은 래리 크랩의 팬 답게,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고, 주소는 'larinari'다. '래리와 나리'(나리는 아가서에서 묘사된 백합꽃의 새번역 표현인데 아내의 닉네임). 래리 크랩과 관련된 검색을 하면, 아내의 블로그가 가장 많이 나올 정도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2021년에 래리 크랩은 별세했다.

 

다시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영적 가면을 벗어라>(원제: 인사이드 아웃)와 세번째 마주하게 됐다. 이번엔 번역자가 바뀌었다. 아주 잘 된 일이다. 첫 번째 번역자가 이 책을 번역했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번역판은 아주 특별하다. 아내가 이 책의 추천사를 쓴 것이다. 

[추천사]

“영적 가면을 벗어라!” 이 문장은 내게 책 제목 그 이상이다. 젊은 날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그때, 내 심장에 화살처럼 꽂힌 사랑의 메시지였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인데, 흐릿해질지언정 사라진 적은 없는 불화살의 흔적이다. 그 시절을 떠올리자 바로 얼굴에 열감이 느껴지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보니 나의 회심 체험이었지 싶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빠르게 신앙의 행위들을 배우고 내면화하며 자랐다. 태어나 보니 한국 사람이었던 것처럼, 태어나 보니 기독교인이었고 목사의 딸이었다. 나의 첫 번째 정체성이었고 자부심이었다. 자부심은 열정을 낳았다. 교회 공동체와 후배들을 위해 시키지 않는 희생과 헌신을 자처하며 열정을 냈다. 그렇게 젊음을 불태우던 시절에 래리 크랩의 『영적 가면을 벗어라』를 읽었다. 아니, 그 책에 나를 읽혀 버렸다. 자부심이었던 그것들이 영적 포장지라는 진단을 받았고, 부끄러움과 충격으로 책을 읽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영적 포장지가 벗겨진 실체는 ‘이만하면 됐지, 나만큼만 해라’는 바리새적인 자부심과 특권 의식이었다. 공동체를 위해,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열정을 다하는 나이건만, 왜 자꾸만 크고 작은 갈등에 휘말리며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지도 설명이 되었다. 입에 쓴 책이었다. 써도 보통 쓴맛이 아니었다.
그러나 쓴맛에 그치지는 않았다. 가면 너머의 초라한 민낯을 마주하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수치스러웠고 고통스러웠지만, 끝은 아니었다. 열심히 한 신앙생활의 대가로 잘되고, 복 받고, 이름을 얻고 싶은 죄된 욕망이 전부는 아니었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었다. 사랑의 예수님을 흉내 내는 것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예수님처럼 될 때만 행복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래리 크랩이 일깨우려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거룩한 행동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가 되고 싶은 내 안의 갈망이 깨어났다. 그러니 “영적 가면을 벗어라!”는 책 제목에 그칠 수가 없다. 내 안의 빛과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수용하는 영적 여정을 안내하는 이정표 같은 문장이다.
그렇게 오래전 이 화살을 맞았건만 나는 또 래리 크랩이 책에서 예언한 그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충격적 경험과 회심 체험으로 단번에 변화되지 못했다. 태어나자마자 그리스도인이 된 운명인지, 일찍 만들어 쓰고 오래도록 썼기에 이 가면은 거의 피부에 달라붙어 있다. 가면이 나인지 내가 가면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 가면 뒤에 숨어 밖을 바라보며 외적인 행위에 매인 습관을 당장 떨쳐 버리지 못하고, 어느 순간 더욱 세련된 영적 가면을 개발하고 살았던 것 같다. 래리 크랩의 책이 번역될 때마다 가장 먼저 찾아 읽고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 첫 만남 이후 십수 년이 지나 나는 ‘신앙 사춘기’ 또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길게 겪었다. 내적인 삶을 돌아보지 않으면 삶과 신앙이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래리 크랩이 경고하는 바로 그 일을 겪었다. 신앙 사춘기를 통해 다시금 “영적 가면을 벗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게 들어야 한다.
영성 생활은 ‘과정’이다. 영적 ‘여정’이라 부를 수밖에 없음이다. 영적 가면을 인식하고 벗기 위해 정직한 기도로 나아가는 것은 한 번 체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번 개정판의 출간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심지어 내게는 마땅한 일이다. 언젠가 이 책으로 영성 생활에 도움받았던 이들이라면, 오늘 이 자리의 삶을 개정판으로 쓰는 의미의 일독이 되었으면 좋겠다. 열정을 다하는 신앙생활이지만 뭔가 빠진 것 같은 헛헛함이나 삶과 유리된 분열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뒤통수를 때리는 망치가 될 것이다. 얻어맞아 아플수록 더 큰 사랑에 안기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영적 가면을 벗어라』는 이 책이 처음 출간된 36년 전보다 오늘 더욱 필요한 책이다.

_정신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

 

 

아내에게 이 책은 아주 각별하다. 아내의 신앙사춘기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고, 아내의 사역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추천자로서 책 몇 권을 선물로 받고서는 내게도 사인을 해서 건네주었다.

 

오랜만에 래리 크랩을 읽었다. 앞서 두 번 읽을 때도 충격적으로 좋았지만, 이번에는 더 좋았다. 그의 고민과 그의 열망이 고스란히 내 고민과 내 열망이기 때문이다. 그가 40대 때 쓴 이 책은 40대를 지나온 내 여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책은 마치 내 이야기 같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내 내면이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움이 들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죄에 대한 부분이다. 그가 정의 내리고 있는 죄, '자기 보호의 죄'가 말하는 바를 나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와르르 무너져 내린 '자기 방어적 태도'가 바로 래리 크랩이 말한 '자기 보호의 죄'였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매일 이 죄와 씨름하며 산다. 그 어느 때보다 재빠르게 내 내면에서 작동한 '자기 보호의 죄'를 자각할 정도가 됐다. 정직하게 인정하고 성찰하면, 그 견고한 자아의 껍질이 흐물흐물해진다.

"그럼 지금 다루는 자기 보호의 죄는 언제 나타날까? 사랑받고 싶은 합당한 목마름이 상처받아서는 안 된다는 요구를 만들어 내면서, 그 요구가 다른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을 누를 때다. 자기 보호를 위한 그 요구가 타인의 행복을 위해 타인에게 기꺼이 다가가려는 우리의 의향을 방해할 때, 우리는 사랑의 법을 어기게 된다. " _ 173

 

책을 읽고 나니, 그가 암으로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책이 읽고 싶어졌다. 책을 펼쳐 단숨에 읽었다. 지금 내 소망이 바로 그건데... 가슴이 뜨겁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다. 래리 크랩! 고맙습니다. 마지막까지 한결같이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내 줘서요. 본이 되는 삶입니다. 

천국을 향한 기다림, 래리 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