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기고/QTzine

염려에서 확신으로

신의피리 2015. 5. 25. 22:48

QTzine [2004/10]

 


<새일염려증후군>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알쏭달쏭 하지요? 아마도 <건강염려증후군>은 들어봤어도 <새일염려증후군>은 들어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다지 어려운 말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염려거리를 가지고 삽니다만, 모든 사람들이 새일염려증으로 고생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건강한 사람들은 새일에 모험적으로 뛰어들기도 하고 그로 인해 적당히 긴장하고 또 그 긴장 속에서 창의력을 발휘하기도 하니까, 어쩌면 적당한 염려는 창조적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매사 염려가 많은 편입니다. 제가 2년 넘게 소화불량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아마도 염려를 많이 하는 기질 때문일 거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완벽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능력이 없는 것이다, 능력없는 사람은 사랑받지 못한다’ 는 논리가 무의식 중에 제 사고와 감정을 지배했기 때문에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염려 많은 제게 ‘확신’이란 말은 언제나 가깝고도 먼 단어입니다. 순간순간 맞는 새로운 일들이 나를 염려하게 만들 때, 과연 이 염려의 상태를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뜻,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로 마음의 중심을 이동시킬 수는 없을까,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훈련을 받아야 할까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럽게도 저는 아직도 이런데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QTzine」의 편집 책임이란 새일을 맡은 요즈음, 저는 <새일염려증후군>의 도전을 서서히 직면하고 있고 이걸 물리칠 방안을 모색 중입니다. 여러 생각들이 이 사역을 염려하게 만들고, 반대로 또 여러 생각들이 이 사역을 가볍게 여기도록 저를 유혹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제겐 전자의 유혹이 절대적으로 더 크죠. 더 큰 문제는, 이 일로 저를 부르시고 또 보내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또렷한데, 뭐가 그렇게 걱정스럽고 두려운 게 많은지 제 마음은 자꾸만 변명을 둘러대려고 하고, 평범한 소시민의 삶에 안주하려고만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새일, 첫 작업을 준비하는 저로서는 마음 중심에 ‘거절과 염려’가 아닌, 제 인생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뜻’이 정착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화두랍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여러분들도 이 책을 펴들고 말씀을 묵상하면 곧 만나겠지만, 어째서 모세의 소명과정이 자꾸만 지금의 제 모습과 겹쳐지는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저러다가 한번 호되게 혼나지’ 싶을 정도로 고집스럽게 거절하고 염려하던 모세에게서, 또 그런 모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서 저는 ‘염려에서 확신으로’ 전환하는 힌트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10월입니다. 우리의 시간표대로라면 결실을 거둬들일 때입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고 일이 지연되어 염려하는 분들, 하나님의 때가 찼으나 내 때가 아니라고 우겨대며 염려하는 분들, 애써 이룩해 놓은 안정이 무너질까 또는 내놓아야 할까 염려하는 분들, 자신의 염려를 모세의 염려와 비교해보고 또 그의 변화된 모습과 확신을 좀 더 면밀히 묵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이 오차 없이 분명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할진대 우리의 작은 염려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지연시키고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모세의 염려도, 바로의 걱정도, 히브리인들의 두려움도 하나님의 일을 막지 못했다 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