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한 지체와 우연찮게 제 설교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유익했지만,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성도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그것도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아니라, 설교 행위 전반에 대한 비평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정말 곤욕스러운 일입니다. (그 지체에게는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설교에 대한 얘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간 몇 차례 직간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지요. ‘어렵다’, ‘주제가 너무 많다’, ‘한 얘기 또 한다’... 이런 논평은 제게 쓰지만 좋은 약이 됩니다. 쉽고 간결하고 선명한 설교가 되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용두사미다’, ‘주제가 불투명하다’, ‘지겹다’... 이런 논평은 거의 악몽 수준이지만 역시 약이 됩니다. ‘진실성이 없다’, ‘자기는 그렇게 사는가’, ‘자기 성공을 위해 말씀을 수단화한다’... 이런 논평은 아직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만약 듣게 된다면 그 다음 주에 설교를 할 수 있을 지 의문이 들 정도의 끔찍한 비평이 될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이 제 존재의 기반입니다. 이 사실을 묵상할 때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고 신기할 뿐입니다. 이 사실은 제 행복의 기초가 되고, 저는 이로 인해 마음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제 삶은 온통 설교로 둘러 쌓여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갓 말쟁이로 타락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본문 연구를 통해 그 때 그분의 메시지의 의미를 캐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정황을 관찰합니다. 두 세계의 다리놓기를 위해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수사에 대해 늘 고민합니다. 무엇보다도 말씀대로 살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갈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이 듣도록 하기 위한 제 설교행위가 얼마나 부실한지를 모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설교자의 입을 통해 성도의 마음으로 풍성하게 흐르도록 하지 못할까봐 사실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대변인에 불과하지만, 통치자의 철학, 통치자의 마음, 통치자의 통치행위를 중간에서 비틀어 왜곡하진 않을까, 그 강렬한 아버지의 사랑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지는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 비평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부실한 제 자신 때문이지요.
하나님께 귀를 활짝 열고 들을 뿐 아니라, 여러분들에게도 귀를 최대한 열고 듣겠습니다. 특히 설교 비평도 소중히 여기고 귀담아 듣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거울삼아 제 얼굴에 묻은 얼룩들을 씻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꿀 생각은 없지만, 제 말의 모양새는 언제든지 고칠 의향이 있습니다. 설교에 귀 막고 무의미하다고 물러나있기보다, 적극적으로 설교에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10/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