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세미한 소리를 듣다

설교, 그 이후

신의피리 2009. 10. 4. 22:20

어김없이 주일 밤이 찾아왔다. 거룩한 강단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설교를 했고, 지금은 강단 '아래'에 내려와 있다. 지금 이 시간은 힘들다. 내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온 '말씀의 칼 끝'이 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렇게도 경계했던 일을 저지르고 말았기 때문이다. '설교'를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내 불편한 감정이 묻어나 있는 오염된 말을 섞지 않겠다던 내 맹세가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나는 준비된 말씀 이외의 (잔소리 같은) 말을 즉흥적으로 하지 않겠다고 오래전부터 맹세했건만, 오늘은 금지의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다.ㅠ

예배 인원의 4분의 3 이상이 지각을 한다. 설교 도중에 들락날락 하는 사람들이 여럿 된다. 조는 거야 생리적인 현상이니 그건 뭐라 할 마음이 없다. 졸지 않겠다고 사투하는 모습이 대견하기까지 하다. 허나 내 눈치를 봐가며 히히덕 거리며 떠드는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잠시 분개한 것은 내 자존심 때문인가, 아니면 거룩한 의분인가. 둘 다라고 해야겠다. 귀 기울여 들어야 할텐데, 들을 귀가 없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동시에 그런 상황을 개선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안타깝다.

이후에 찾아오는 마음이 어렵다. 내가 그토록 멸시하던 '나이브한 설교자'의 하나가 된 것인가? 저들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인가? 저들로 인해 우리 공동체는 성장이 어려운 것인가? 여러 질문들이 후폭풍처럼 몰아치기 때문이다. (그게 다가 아닐 것이다. 과도한 추측은 자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쓰신 <설교와 설교자>를 뜨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내 뇌리 속에 박힌 문구가 하나 있다. 설교자들이라면 누구나 반할 만한 문구이다. "불붙는 논리",,, 설교는 탄탄한 논리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청중의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을 겨냥한 열정과 결합된 논리여야 한다. 맞는 말이다. 붙붙는 논리로서의 설교를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내 책임이다. 성령께서 이 설교를 성도의 마음에 박아 넣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청중들의 귀를 잡아당기고, 시선을 집중시키고, 입을 벌려 말씀을 그 속에 넣어야 한다. 그 약이 한 영혼을 치유하는 것은 성령의 하시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 예배에 지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설교자로서의 내 책임을 상기시킨다. 설교자로서의 내 자질과 성실성과 태도를 모질게 매질하는 바이다.

이번 주는 설교를 많이 해야 하는 주다. 화요 기도회 설교, 수요찬양예배 설교, 두 번의 새벽설교... 하나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도구로서의 설교자가 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