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이라는 단어는 참 모호하다. 끌어당기고 싶기도 하고 밀쳐내고 싶기도 하다. 있으면 좋겠으나 없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도 든다. 야망이라는 단어는 신앙의 눈으로 봐도 모호하다. 낮에는 비전이라는 옷을 입고 화려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밤엔 욕망이라는 옷으로 갈아입고 밤거리를 배회한다. 야망이라는 단어는 붙잡기에도 놓아버리기에도 아쉬운 애매모호한 단어다. 적어도 내겐.
나에게 야망이 있는가. 내가 남자이기에 야망이 없다 할 수 없다. 내 분야에서 남들이 쉬이 도달할 수 없는 ‘업적’을 이루고 싶은 큰 바램이 내게 없는 것은 아니다. 축구 감독이라면 국가 대표를 맡고 싶은 건 당연하고, 국가 대표 감독이라면 월드컵에서 ‘일’을 내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 야망은 단지 개인의 야욕인 측면도 있겠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목회자이자 청년들을 지도하는 내게도 모순 같지만 야망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내게 야망이 있는가. 있다. 나는 내가 가르치고 섬기는 우리 TNT 젊은이들이 ‘예수님 닮은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게 야망인가. 그렇다. 그래서 이 젊은이들이 이 사회에서 크든 작든 자신에게 부여된 재능을 극대화하여, ‘빛과 소금’으로 쓰임 받기를 원한다. 이 소망은 미래형이다. 이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나는 오늘 우리 젊은이들에게 ‘설교’를 통해 좀 닦달도 한다. 때론 당근도 주고, 때론 채찍도 든다. 때론 안식하라 하고, 때론 쉬임없이 뛰라 한다. 때론 함께 짐을 나눠지고 때론 홀로 내버려 둔다. 그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예수님의 열정을 본받고, 예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약한 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예수님처럼 살다 예수님처럼 죽길 바란다. 이건 내 소망이자 내 사역의 근간을 이룬다.
내가 가진 야망엔 항시 유혹이 따름을 모르지 않는다. 야망을 비전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 결국 나의 성공을 얻기 위한 소모품으로 사람들을 이용할 수도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이 일이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를 온갖 논리로 정당화 할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을 때마다 ‘야망’을 깡그리 부순다. 내 안에 꿈이란 꿈은 다 산산조각 내 버린다. 그리고 나는 실패를 사랑한다. 비난도 기뻐한다. 늘 실패함이 늘 자랑스럽다. 물론 아프고 눈물 나지만, 실패와 비난은 내 고장 난 야망이 거룩한 분의 손 안에서 다시 수리되어 하나님 나라의 한 조각으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여러분들, 조심하시라! 나는 야망이 있는 목회자다.
2010/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