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기고/QTzine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신의피리 2015. 5. 25. 23:02

QTzine [2005/02]

 김종필 편집장 qtman@young2080.com


 

<교육계 갈등의 원인과 대책>이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교육계의 내 노라 하는 리더들이 온다 하길래 토론의 진수를 보겠구나 하는 기대로 참석했었지요. 그렇지만 제 기대는 첫 시간부터 보기 좋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장단의 대표로 오신 분이 토론회의 주제며 방식이며 통 잘못되었다고 성토하더니, 교원단체의 대표가 참석하지 않은 걸 핑계 삼아 퇴장해 버린 것입니다. 그 이후의 토론은 안봐도 비디오겠죠?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사실 2004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육계 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었죠. 마치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들처럼 고집과 고집이 맞붙어 싸우는 날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고, 우리 국민들은 입만 있고 귀는 없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지난 해 초유의 사건인 대통령 탄핵은 두 거대 정당이 완고함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배척받아 중소정당으로 전락하는 결과까지 초래했지요. 완고한 고집스러움에 마음을 줄 국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역사를 뒤져 보면 완고함 때문에 망한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대표적 케이스는 이집트의 바로왕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뭇매를 맞고서도 ‘그래 너죽고 나죽자’ 하는 태도로 달려들다 몰락한 쫄장부를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탄식에도, 예언자의 경고에도, 신의 음성에도 꿈쩍 않고 제 생각대로 밀어붙이려다 망한 바로는 오늘 우리에게 좋은 반면선생이 됩니다.


그런데 이건 또 어인일일까요? 출애굽 사건을 민족의 최대 교훈으로 삼아온 이스라엘은, 어째서 바로의 완고함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자기 앞에 놓여진 선민의 복을 걷어차고 하나님의 양자가 된 이방인들을 질투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을까요? 어찌하여 이스라엘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완고한 백성이 되었을까요? 어쩌다가 하나님의 마음은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 이스라엘로부터 영적 자손인 이방인들로 넘어가셨을까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완고함’이란 병은 병중에도 가장 처방이 어려운 중병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해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완고함이라는 흑사병에 혹 당신은 무사하신가요? 혹시 타인과의 대화 중에 말해진 말만 듣고 은폐된 상대 마음의 소리는 듣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혹시 말씀을 펴들었는데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닌가요? 날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지지가 조금 식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진 않은가요?


저도 편집장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향해 독자를 향해 귀를 활짝 열어 놓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