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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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드 싯처, '아케디아'에 관하여

"그러므로 기도와 노동의 일과에 안주할 때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유혹이 '아케디아'(acedia)라는 것은 놀랍지 않다. 아케디아는 쉽게 번역하기 힘든 헬라어 단어로 1,600년 전에 에바그리우스가 수도자들에게 지적했던 것이다. "나태"는 게으름을 뜻하므로 옳지 않은데, 이는 아케디아의 의미라기보다는 결과다. 아케디아는 권태, 불안, 부주의로 정의하는 것이 좋다. 일과로 인해 우리는 성급해질 수 있다. 그래서 신앙 성숙과 삶의 풍성한 수확에 이르는 더 쉽고 빠른 길이 있기를 바란다. 또 지름길을 택하기 원한다. 그래서 도중에 즐거운 일을 찾고, 빠르게 발전하는 과정이 눈앞에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단조로움과 지루함에 싫증 나기 충분할 정도로 오랫동안 기도와 노동의 일과를 따를 때, 수도원에서 '..

마태복음 26:26-35 / 인자와 진실은 영원하다

마태복음 26:26-35 26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27 또 잔을 들어서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모두 돌려가며 이 잔을 마셔라. 28 이것은 죄를 사하여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2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내가 나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것을 마실 그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절대로 마시지 않을 것이다." 30 그들은 찬송을 부르고, 올리브 산으로 갔다.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목자를 칠..

렉시오 디비나 2024.04.16

[제주안식15] 고독, 침묵과 친해지기

갑자기 걷는 시간이 많아지니 당장 무릎에 무리가 가나 보다. 무릎 통증이 생겼다. 해서 오늘은 숙소에서 늘어지게 쉰다. 쉴 때는 책을 읽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모처럼 독서량이 많은 오전이다. 아무래도 좁은 숙소에 종일 있으려니 몸이 늘어진다. 몸이 늘어지면 영혼도 탁해지는 것 같다. 불안감이 솔솔 몰려온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있어도 괜찮은 건지 싶다. 잠시 밖에 나가 걷는다. 바다로 나간다. 돌담 사이를 걷는다. 이 마을 저 마을 골목골목을 한량처럼 느릿느릿 걷는다. 느리게 걸을 때는 뒷짐 자세가 최고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손이 뒤로 돌아간다. 느리게 걸으면 자세히 보인다. 새삼 길가에 핀 꽃들과 여기저기에서 지저귀는 새들과 위험한 아스팔트를 가로지르는 벌레들에 눈과 귀가 쏠린다. 눈..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

제주 도착 다음날부터 비가 왔다. 신창리에 있는 무명서점에 갔다가 그냥 나오기 민망해서 아무 책이나 골랐다. 소설을 읽고 싶었는데 얇았다. 저자가 누군지 몰랐는데 202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다. 아침 그리고 저녁마다 감상에 젖곤 했는데 제목이 좋았다. 그래서 골랐다. 언듯 보면 이유 없어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다 이유는 있다. 어제 오후에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오늘 오전에 다 읽었다. 주인공 요하네스가 태어나던 순간, 그의 아버지의 시선은 그 탄생 순간에 머물러 있다. 그것이 '아침'이다. 이야기는 곧장 태어난 아기 요하네스의 죽음의 순간으로 이동한다.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는 요하네스가 죽음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다. 마침내 주인공은 자신의 죽음을 깨닫고 받아들인다. 먼저 죽은 친구 페테르가 요..

마태복음 25:14-25 / 예수의 꿈 유다의 몽상

마태복음 25: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사람 유다라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15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다. 16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7 무교절 첫째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우리가,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려고 하는데, 어디에다 하기를 바라십니까?" 1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성 안으로 아무를 찾아가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때가 가까워졌으니, 내가 그대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하십니다' 하고 그에게 말하여라." 19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들에..

렉시오 디비나 2024.04.15

[제주안식14] 조급증 치유

주일이다. 교회에 가야 한다. 주말이라 오전에 버스 운행 시간이 안 맞는다. 걸어서 간다. 1시간 20분 소요 예정이다. 시골길을 걷는다. 2차선 도로엔 보행자 길이 없다. 그래도 안전하다. 주일 오전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차가 거의 없다. 바람이 분다. 기분이 좋다. 갑자기 중고등부 시절에 불렀던 찬양이 흘러 나온다. 알았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이젠 더 피하지 않으리 주님 앞에 가 나를 맡겼네 진정 기쁜 날였네 삶은 의미 없고 안식 없었네 그러나 이제는 달라 새 삶이 내게 임했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이젠 더 피하지 않으리 그가 내게 와 나를 구했네 진정 기쁜 날였네 단조의 찬양이다. 부르면서 새삼 깨닫는다. 가사와 단조가 이렇게 부조화라니. 그런데도 은혜롭다니! 모처럼 교회 가는 길이 기대가 되고 즐거워..

마태복음 25장 / 어떻게 살(죽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의 다소 거칠고 매서운 뉘앙스가 풍기는 마태복음 25장 설교에서 나는 이 두 질문을 내내 던지게 된다. 인자가 오는 날이란, 언젠가 나는 죽는다는 말로 읽힌다. 그날이 언제일지 나는 모른다는 말이다. 인자가 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잊은 채, 오늘 제 욕망을 추구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나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가장 나쁜 삶으로 기억될 것이다. 언젠가 죽을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마음 가짐은 '메멘토 모리'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겠다. 그렇다 하여 하루하루를 죽음의 그림자에 눌려 살겠다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오늘이 소중한 것이다. 매순간이 빛나는 오늘이 되도록 사는 것이다...

렉시오 디비나 2024.04.14

[제주안식13] 좁고 작고 낮은 수준을 받아들이며

낮부터 날씨가 맑아질 예정이다. 구름이 없다. 이제 금악오름에 오를 때가 왔다. 서둘러 버스 시간을 알아 본다. 12시다. 점심은 나가서 먹는다. 두모리사무소 앞에서 785번 간선버스를 탄다. 주말이라 운행 횟수가 적다. 이용객도 적다. 또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이러다 버스회사 문 닫는 거 아닌가. 이렇게 승격이 적으면 적자 날 텐데... 금악리에서 식사를 한다. 백종원 골목식당에 나왔다는 광고 때문인지 인근 3~4개 식당에 손님들이 가득이다. 이제 금악오름을 향해 걷는다. 이효리가 뮤직비디오를 찍어서 유명해졌다고 하나, 아래에서 보니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동네 뒷산 같은 느낌이다. 금악오름에 가까이 다가가자 패러글라이딩이 보인다. 멋있다. 고개를 들고 연신 사진을 찍는다. 공중에서 여성의 비명소리가..

마태복음 26:1-13 /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

마태복음 26:1-13 1 예수께서 이 모든 말씀을 마치셨을 때에,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너희가 아는 대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인데, 인자가 넘겨져서 십자가에 달릴 것이다." 3 그 즈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서, 4 예수를 속임수로 잡아서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5 그러나 그들은 "백성 가운데서 소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명절에는 하지 맙시다" 하고 말하였다. 6 그런데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는,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8 그런데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말하였다. "왜 이렇게 낭비하는 거요? 9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

렉시오 디비나 2024.04.13

[제주안식12] 수다와 보행

이민재 목사를 만났다. 제주에 살고 있는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 다니던 모교회 1년 후배다. 장신대를 나와 통합측 목사가 됐고, 나는 무늬만 고신 목사가 됐다. 청소년 시절 이후, 한참 세월이 지나 다시 연락이 됐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한 십여 년 전에 제주로 내려왔다. 서귀포 외곽 마을에 터를 잡고 목회를 한다. 한때 동네 주민들의 귤 농사를 내륙으로 연결해 주는 일도 시도해 보았고, 나는 그를 통해 맛있는 귤과 한라봉을 저렴하게 몇 차례 구매한 적도 있다. 그와 내가 있는 곳 중간 쯤인 모슬포항 근방에서 만났다. 나는 한경에서 버스 타고 가고, 그도 서귀포에서 버스 타고 왔다. 참 대화할 맛이 나는 친구다. 그는 나보다 좀 더 진보적이다. 독서량도 많고, 아주 시원~한 욕도 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