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자리, 그분의 마음

김종필 100주년기념교회 목사

 

어느 해 겨울 2박 3일의 피정(避靜)을 맞아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는 <예수원 공동체>를 방문했다. <예수원>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들이 침묵과 노동 속에서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많은 이들의 오랜 기도가 흰 눈과 더불어 수북이 쌓여 있었던 까닭인 지, 예수원의 뜰을 밟는 것만으로도 세속의 때가 말끔히 씻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삐걱대는 마룻바닥에 방석을 깔고 살포시 무릎을 꿇으면 침묵을 깨는 순명(順命)의 기도가 흘러나오고, 성경을 펼치면 주목하는 활자마다 마치 돋보기를 통해 보이듯 또렷하고 굵은 문자로 도드라지게 보인다. 추위에 얼어붙은 딱딱한 산길을 따라 오롯이 걷다 보니 성령님께서 중요한 미션을 막 귀띔해 주실 것 같은 거룩한 신비감에 휩싸인다. 이런 경험만으로도 피정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피정은 말을 버리고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다. 피정은 성취를 향한 욕망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지금 여기 성령님 안에 머무름이 주는 위대함에 몰입하는 공간이다.

 

2박 3일간의 짧은 피정의 은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저녁 종이 울리니 밥상 공동체가 꾸려진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이고, 봉사자들은 분주하게 간소한 식탁을 준비한다.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소박한 밥상이 주는 은혜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나니, 마주 앉은 한 지체가 묻는다.

“형제님,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아세요?”

“아니요, 전혀 모릅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요?”

“대천덕 신부님이 생전에 늘 그 자리에 앉아서 식사하시던 자리예요.”

 

그 순간 뭔가 감각과 심령의 빠른 변화가 감지됐다. 앞에서 분주하게 식탁을 차리던 봉사자들의 수고가 남다르게 보인다. 밥상의 값어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은혜란 생각에 목이 멘다. 이곳 산골짜기에서 드린 조촐한 기도와 소박한 나눔이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이 조국 교회에 무언가 기여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 자리, 평생 대천덕 신부님이 앉아서 식사하던 그 자리에 앉으니, 조국교회를 향해 기도하던 그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된다. 누군가의 일상의 자리, 누군가의 고된 눈물의 자리, 누군가의 밥상의 자리에 앉아보면 그의 마음과 내 마음이 연결된다.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기도의 자리, 그의 일상의 자리, 그의 눈물의 자리에 앉아 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또한 예수님의 일상의 자리, 눈물의 자리, 밥상의 자리에 앉아 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자 한다면 스스로 종이 되어 자기를 비워 십자가 지신, 그 눈물의 자리에 앉아보시길 바란다. 십자가를 져 보면 그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될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_빌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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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에 등, 내 길의 빛

100주년기념교회 김종필목사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화사했던 봄, 짙푸르렀던 여름, 고즈넉한 가을을 지나 쓸쓸한 겨울을 또다시 맞는다. 한 해의 끝자락에 이르니 자연스럽게 걸어온 길을 반추하게 된다.

 

‘지금의 내 모습은 일 년 전 내가 꿈꿔왔던 그 모습일까?’, ‘지금의 내 삶은 젊은 날에 내가 꿈꿔왔던 그 미래였을까?’ 그렇지 않다. 내 계획은 처음보다 많이 빗나갔다. 내 계획대로 된 것이 별로 없다. 몸무게는 줄지 않았고, 관계는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고, 믿음은 생각만큼 진보하지도 성숙해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다. 여전히 주님과의 소통이 끊어지지 않았고, 되돌아올 말씀의 자리가 있으니, 이 정도면 최악은 아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잠 16:9)임을 온 몸으로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어쩌면 잘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내년엔 내 뜻 앞세워 전전긍긍하며 살지 않고 주님 뜻 안에 더 많이 머무르려고 애쓸테니, 이 정도면 괜찮은 성찰이고, 괜찮은 한 해다.

 

‘일 년 후의 내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질까?’, ‘내 젊은 날의 꿈에 조금이라도 근접한 인생이 될까?’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미래는 말씀의 조명하에 선명하게 내다보이지 않을 것이고, 울퉁불퉁한 거친 길이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여전히 몸은 무거울 것이고, 건강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고, 살림살이는 쪼들리고, 친구는 더 생기지 않고, 공허와 유혹은 거세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다. 미래가 더 나아질지 악화될지 알 수 없고, 감사가 절로 나올지 한탄이 멈추지 않을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지라도 괜찮을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 다시 말씀 앞에 서는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대개 주님의 말씀은 내 한 걸음 앞만 비춰준다. 내가 내디뎌야 할 지점과 방향만 조명해준다. 그러다보니 그 말씀의 길이 맞는 길인지, 잘 선택한 것인지 마음 졸이며 살며시 근심하게 된다. 그러나 한 걸음의 앞길만 말씀이 비춰주고 있음을 내가 믿고 의지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안전한 것은 없다. 내가 가진 자원들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말씀만 의지하여 걸어가라 하시는 하나님만의 특별한 인도하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먼 앞길, 목표지점이 안보인다 해도 걱정할 일이 아니다. 한 걸음 앞만 말씀이 여전히 비추고 있다면, 그러면 내 과거는 최선이었음이 드러나고, 내 현재는 선물이며, 내 미래의 끝은 안전한 주님의 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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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걸어야 보인다. 1

 

김종필 100주년기념교회 전임목사

 

집에서 교회까지의 거리가 1.5km입니다. 낮에 차를 써야 하는 일들이 많아 보통은 자가용으로 출근을 합니다. 출근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 어느 날 차가 고장 나서 부득이하게 걸어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걸으면 20분은 소요되는 거리입니다. 그날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왠지 거리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매일 수년을 지나다닌 길인데도 마치 남의 동네 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집집마다 담벼락 너머로 뻗어 나와 있는 감나무들이 정겹습니다. 낡아 보이는 어떤 빌라 앞마당에 예쁘게 가꾸어져 있는 작은 정원을 잠시 멈춰 서서 구경해 봅니다. 얼마 전에 부동산 간판을 분명 본 기억이 있는데 어느새 예쁜 카페로 변신한 곳도 있습니다. 건물마다 숨어 있는 조그만 주점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도 깜짝 놀랐습니다. 게다가 좁은 이차선 도로를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고 위험해 보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들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참 희한합니다. 차를 타고 다닐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걸으니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거기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걸으니 보입니다.

 

목적지를 향해 빠르고 바쁘게 갔다,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빠르고 바쁘게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목적만 생각하며 빠르고 바쁘게 가다 보니 지나쳐 버리는 것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목적지를 향해 가긴 가되, 느리게 걸으면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가다보니 주변에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무의 변화가 보이고, 하늘 색깔의 미묘한 차이가 보입니다. 길가에 잡풀들이 비좁은 흙을 터전 삼아 생존을 위한 꽃피움에 미소를 짓게 됩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표정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형형색깔의 다양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양한 생김새와 외모를 저마다 뽐내며, 다양한 표정과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걷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빠르게 달릴 때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니, 그 때 보았던 것들이 전부가 아니요, 진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걷다 보니 주님께서 이렇게 속삭이시는 듯합니다.

“빠르고 바쁘게 살다보면 정말 보아야 할 게 안 보인단다. 보이는 게 전부라 믿게 되면 애석하게도 자기가 본 걸 진리라 착각하게 되지. 안타깝지만 그 사람이 진리라 우기는 그 자리가 실은 지옥에 가까운 데, 그 중독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지. 그러니 나와 같이 천천히 걷자꾸나. 느리게 걸으면 사람의 결이 보이고, 생명의 흐름이 보이고, 네가 걸어가야 할 소명의 길이 보일거야. 나와 같이 느리게 걷자꾸나. 천국에서는 다 느리게 걸어.” 

Posted by 신의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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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산

김종필 목사

 

내 부친께서는 위암 말기 선고를 받고 불과 40여 일 투병 후 74세에 별세(別世)하셨다. 구십은 사실 줄 알았는데, 처음 맞이한 병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황망하게 떠나신 것이다. 떠나신 분도 남는 가족도 갑작스러운 이별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그 마지막 며칠,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투른 우리 가족은 그 죄스러움을 표현할 길이 없어, 때론 침묵으로 때론 무덤덤한 일상이야기로 죽음의 기운을 견딜 뿐이었다. 목회자인 나는 부친의 죽음을 단 하루도 연장할 수 없는 무기력 때문에 더더욱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씀도 남기지 않고 떠나신 부친의 빈자리에는 여러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제일 먼저 치고 들어온 파도는 그리움이었다. 식사를 못하시던 아버지는 마지막 며칠간 요거트만 드셨다. 작은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요거트를 입에 떠드렸는데, 그 모습이 눈에 잊히질 않았다. 휴가철이 되면 부모님 모시고 산으로 바다로 다니던 여행 생각에 목이 메었다. 내 두 아이를 찍어주던 카메라, 어머니와 함께 마지막으로 갔던 겨울 여행 때 입었던 점퍼, 홀로 계실 때 즐겨 사용하시던 MP3플레이어, 부친의 부재가 느껴질 때마다 그 빈자리에는 어김없이 그리움만 쌓이고, 눈물의 파도만 쏟아졌다.

 

그리움의 파도가 치고 빠지면 다음엔 후회의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씀 못 드린 게 후회가 되어 홀로 화장실 거울을 보며 수차례 가슴을 치고 또 칠뿐이었다. 전년도 아버님 생신 때 교회 행사가 있어 못 가본 게 천형(天刑)이 된 듯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기도와 간절함이 부족해서 병마를 이길 힘을 못 드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어 울음만 더할 뿐이다. 말없이 떠난 부친의 빈자리에는 무기력한 못난 죄인만 남은 듯했다.

 

부친 사망신고를 하기 위해 관할 동사무소를 방문하여 신고를 마친 후 가족관계증명서를 받아 들었다. 부친 생의 ‘끝’을 받아 든 내 손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인생은 참 신비스럽다. 하나님은 참으로 역설적이시다. ‘끝’을 끝으로 받아 든 그 순간, 새로운 ‘시작’이 비로소 시작되니 말이다. 그리움의 파도로 밀려들어온 그 감정은 소망의 파도로 뒤바뀌고, 후회의 파도로 밀려들어온 그 감정은 사랑의 파도로 승화가 된다. 어찌 된 일일까.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몸을 쓰러뜨리며 그것으로 인생을 끝내신 게 아니었다. 죽음에 빼앗긴 아버지의 몸은 천국을 향한 길이 되어 마지막 유산을 남기신 것이다. 어쩌면 그전엔 그저 관념이었고, 그저 낯간지러운 감정에 불과했을 ‘천국 소망’은 이제 분명한 실재가 되고 믿음이 되어 내 가슴으로 밀려들어온 것이다. 어쩌면 이 땅의 모든 부친의 몸은 죽음으로 소망을 사서, 마지막 유산으로 남겨놓는지도 모른다.

이제 천국에 가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다. 평생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보지 못한 말, 거기서 아버지를 만나 기어야 말해야겠기 때문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제 아버지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Posted by 신의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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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목사, 나쁜 목사

김종필 목사

 

읽고 있던 책이, 낮에 만나 커피 한 잔을 나눈 지인이, 어제 본 영화가, 하다못해 아침 식탁에서 부스스한 얼굴로 아이가 던진 질문이, 한 가지 이야기를 건네올 때가 있다. 때로 성령님은 이렇게 말을 걸어오신다.

 

얼마 전 책을 읽다가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교실에서 정신줄 놓고 딴 짓하다 선생님에게 걸려 등짝을 한 대 맞은 것같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진 피터슨이 쓴 『목회자의 영성』이라는 책 35쪽을 읽는 중이었다.

 

“목사 앞에 붙는 ‘바쁘다’라는 형용사는 마치 ‘간음하는’ 아내나 ‘횡령하는’ 은행가라는 말처럼 우리 귀에 들려야 한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스캔들이고 신성모독적인 모욕이다.”

 

나는 이 문장을 눈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귀로도 들었다. 이는 바쁜 일과 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며 살고 있는 나를 향한 주님의 경고임에 분명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아내와 영화 한 편을 보는데 또다시 비슷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영화 『데몰리션(Demolition)』(장 마크 발레 감독, 2016년)을 보던 중 말미에 주인공이 차 안에서 집어든 메모지에 쓰인 문구가 자막으로 등장하자, 그 문장은 음파로 전환되어 내 귀로 들어와 마음에 새겨졌다. “바쁜 척 그만하고 나 좀 고쳐줘요.”

 

참 묘한 일이다. 영화를 본 지 이틀 후, 연속해서 네 명의 성도님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비슷한 음성들이 계속 내 귀에 꽂힌다. “목사님, 바쁜 데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해요.”, “목사님은 늘 바쁘신 것 같아 가까이하기 힘든 것 같아요.”, “목사님 바쁘시니 제가 시간 많이 안 뺏을게요.”, “목사님 바쁘신데 그런 일까지 하셨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주님께서 연일 귓등으로도 안 듣는 내 귀를 후벼 파시듯, 거듭거듭 말씀하고 계심을 깨닫는다. 내가 얼마나 아둔하고 게으른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바쁜 일과에 매여 있는지, 주님께서 새벽에 결정타를 날려 깨닫게 하신다. 말씀 한 구절이 계속 내 뒤를 따라오며 내 발목을 잡는 것 같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편 62:1)

 

빠른 템포에 휩쓸려 바쁜 척하다 생명을 잃을까 하여 주님께서 내 뒷덜미를 잡고 속도 좀 줄이라고 경고하시는 목소리임에 분명하다. ‘네 주님, 알겠습니다. 바쁜 척 그만하고 주님 앞에 잠잠히 머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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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교구 소식지 6호. 2015/11/01


눈물로 드리는 새벽

 

딱히 외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쓸쓸하다. 가을 탓이다. 10월에서 11월로 넘어가는 이 시간을 단 한 번도 그냥 지나친 적이 없다. 나뿐이랴! 이 계절의 고개를 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법이다. 곧 서른을 앞둔 스물아홉만 힘든 게 아니다. 인생의 불완전성 때문에 흔들리는 20대만 힘든 게 아니다. 중학교 졸업을 준비하는 우리 딸내미도 인생살이를 고달파한다. 마흔 중반을 지나고 있는 나도 쓸쓸한 정서가 겹겹이 쌓인다. 이 허전함을 어찌하랴!

 

적막한 새벽, 교회당 구석에 앉아 십자가를 응시한다. 위로부터 오는 소리는 없다.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잡소리들이 생각을 흩트려 놓는다. ‘한 말씀만 하소서. 갈증난 마음에 나직이 읊조려본다. “절 불쌍히 여겨주소서. 마뜩한 언어를 고를 수가 없어서 매번 주문 외듯이 반복한다. 십자가를 올려다보니 얼핏 근심에 쌓인 한 남자의 그늘진 얼굴이 보인다. ‘무엇 때문에 그리 무거운 얼굴이신가요?’ ‘네 얼굴 아니냐? 내 얼굴이기도 하니라.’ 공상 속에서 만든 내 언어인지, 내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인지, 주님의 음성이기를 바라며 지어낸 내 환청인지, 분간 할 수 없는 대화가 진행된다.

 

눈물이 마른 게 언제부터인가? 신학교 시절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딱히 뭐가 슬퍼서도 아니고, 은혜에 벅찬 감동 때문만도 아니었다. 오랜 방황 끝에 드디어 제자리에 온 듯한 안도감이랄까? 더 이상 딴길로 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듯 주님, 주님부르며 필사적으로 눈물로 매달리곤 했다. 그러다보면 나만 가련한 존재가 아니라, 내 가족도, 내가 섬기는 이들도, 내 교회도, 내 조국도 모두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가련한 존재들임에 가슴이 아팠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도리어 눈물샘은 막혔다. “네가 맡고 있는 청년들 위해 언제 눈물 흘려 보았느냐?” 근심에 찬 십자가에서 주르륵 눈물이 흐르는 게 보인다. 나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한결 같건만 그새 변한 건 나다. “결국 너도 변하는 거냐하시며 실망한 듯한 그분의 표정이 마음을 찌른다. 기근이다. 기갈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기도하는 이들의 언어 속에 하나님과의 독대라는 표현이 도드라진다. 쓸쓸할수록 더욱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홀로 길을 걸으며 하나님과 독대했던 바울처럼, 나도 그대들도 그분과 독대할 필요가 있다. 나를 위해, 그대들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있는 감성이 필요하다. 아니 그건 감성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그분의 눈물이다. 그 눈물이 간절히 그립다. 이 가을에 되찾아야 할 내 소명이다.

 

 

Posted by 신의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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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교구 소식지 5호. 2015/10/25


지금 여기, 주어진 작은 일에서 행복하기

 

교구소식지 칼럼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다. 딱 마음에 드는 주제가 안 생긴다. 흰 백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떠오르는 단어들을 썼다 지웠다 하기가 벌써 한 시간째다. 조급함의 바람이 불고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괜한 일 했나보다 하는 후회와 글쓰기 실력의 열패감 때문에 잠시 낙담한다.

글쓰기를 중단하고 시선을 돌린다. 이디오피아 예가체프 커피 한 잔을 찬찬히 내리니 고소한 향기가 번져가는 게 보인다. 글렌 굴드가 1955년도에 연주한 바흐(Bach)Goldberg Variations을 들으니 번민이 일거에 사라진다. 그리고 하얀 백지 위에 내 마음을 살며시 포개 얹어본다. 주님과 응접실에서 마주 앉은 느낌이다. “주님, 안녕하세요? 글을 하나 써야 하는데, 청년들과 공명할 수 있는 좋은 글 하나 쓰고 싶은데, 제 영혼은 텅 비고, 소통은 단절된 느낌이에요. 주님, 저나 그들이나 다함께 하나님나라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 맞지요? 주님의 마음이 제 마음이 되고, 제 생각이 주님의 비전의 일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를 가지세요. 저를 사용해 주세요.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어진 작은 일을 대하는 내 마음 안에 주님이 주시는 바램이 깃들어 있는가, 그것을 수행하는 내 마음에 자족이 차오르는가, 스스로 물어본다. 묻고 답하는 사이 어느새 황량했던 내 마음에 훈훈한 영적인 기운이 스며온다. 지금 여기, 주어진 작은 일을 품고, 주님 안에서 행복하기 성공!   

Posted by 신의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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