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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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만난 문장

헨리 나우웬, 예수님의 이름으로

신의피리 2007. 1. 20. 16:33
 내 블로그의 제목은 헨리 나우웬의 책 제목 <상처입은 치유자>의 원제인, The Wounded Healer이다. 헨리 나우웬의 삶과 생각이 좋다. 학교 과제로 그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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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윤리학/ 독후감 
        헨리 나우웬, 『예수님의 이름으로』

       낮은 데로 임하는 지도자 
                                            김종필/ 0614032


친숙한 신부 헨리 나우웬

한국의 개신교도들이 가톨릭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다. 마리아를 숭배하고, 술․담배를 즐기며, 제사를 허용하고, 연옥이라는 희한한 교리를 믿는 등,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더 많이 생각하기 때문에 거의 이단에 가깝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부나 수녀들 중에 간혹 개신교도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들이 있다. 낯선 타종교의 이미지를 지우고도 남을 그들의 헌신적인 실천적 신앙이 개신교도의 선입견을 넘어선 것이다. 과거엔 테레사 수녀가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또 헨리 나우웬도 개신교도들에게 꽤 알려진 가톨릭 신부이다.

헨리 나우웬은 세계 최고의 학문 기관의 교수직을 포기하고 장애인 공동체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기거하며 맑고 순수한 영성에 관한 진솔한 글들을 발표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의 책들은 국내개신교 출판사들을 통해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왔고, 개신교 신도들은 아무런 의심과 선입견 없이 그의 책을 통해 그의 삶을 동경했으며 그의 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사랑받는 우리의 영적 지도자의 거봉으로써 손색이 없다.

헨리 나우웬의 책 표지에는 거의 대부분 그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자리잡고 있다. 노신부의 얼굴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참 맑은 표정이다. 그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투명하고 깨끗한지 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그의 이력에 대한 배경 지식이 조금씩 생기면 생길수록 더욱 그의 얼굴은 성스럽게 보인다.

나는 한 때 헨리 나우웬의 그 얼굴이 잊혀 지지 않아 그의 사진을 방에 걸어놓고 싶은 충동이 생긴 적이 있다. 마치 그가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향>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자기 거실에 걸어놓고 영적인 도전을 받았듯, 나는 그의 얼굴로부터 영적인 도전을 받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다. 그의 장애인 섬김 때문만도 아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의 삶과 앎의 아름다운 일치를 느끼며, 과연 나의 앎이 무엇을 위함인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정직하게 내 안에서 미세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나우웬을 통해 성령에게로 인도함을 받곤 했다. 일상에 쩔어 갈 때마다, 나우웬의 사진을 보는 것이 그러니 즐겁지 아니한가!



그의 리더십, ‘상처 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하면 제일 먼저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를 아주 유명하게 만든 그의 주저이기도 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사실 그의 책들을 펼쳐 읽어보면 어느 곳에서든지 이 말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 목회자들의 정체성과 소명을, 현대 세계에서 늘 상처입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치유하는 자로써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세계 최고의 석학들처럼 그런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연약한 사람들, 세상에서 부적절함을 느끼는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치유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킨다고 말한다.

21세기 크리스천 리더십에 관한 그의 통찰을 담은 『예수님의 이름으로』도 이 연장선 상에 있다. 그는 리더십의 조건을 세상에서 말하는 리더십의 대척점에서 찾는다. 세상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멋있게 보여야 한다’, ‘힘이 최고다’라고 말하지만 그는 오히려 비현실적(신비적)인 리더십,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리더십, 힘을 포기하는 리더십을 말한다. 실은 그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지식들의 소개서가 아닌, 그의 경험과 그의 내면의 소리로부터 나온 고백들이다. 그는 자신의 앎이 삶 속에서 돋아나올 때 참 힘이 있음을 알기에, 그는 충실하게 자신을 텍스트로 삼아 리더십의 조건을 뽑아낸다.

자신의 연약함에서 리더십을 발취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독특하게도 그는 성경의 두 장면에서 리더십의 조건을 착안해 내는데, 예수님의 시험 장면(마 4:1-11)과 베드로의 소명 사건(요 21:15-19)이 그것이다. 예수님의 연약함을 공략하는 사탄의 소리를 물리치신 예수님의 대답에서, 완전히 자존심이 구겨지다 못해 처절하게 무너진 베드로에게 다시 소명을 맡기시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나우웬은 이 시대의 리더십의 유혹과 질문․과제․도전을 읽어낸다. 그리고는 세 가지 훈련을 제안한다. 참으로 멋있는 구성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에게 도전한 사탄의 유혹에서 시대의 유혹을 끄집어내고, 베드로의 소명에서 이 시대 목회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요청을 발견해내며, 마침내 자신의 삶에서 적용하고 실천하여 찾아낸(그러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리더십을 고리타분하지 않고 진솔하게 제안한 나우웬의 요청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서번트 리더십, 군림하는 리더십

이 얇은 책, 짧은 그의 강연을 듣고 나니 실은 감탄하며 읽은 것과는 달리 결론적으로는 의문투성이만 남는다. ‘도대체 현실은 왜 이리도 다른가’ 하는 점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로 모인 교회는 말만 '서번트(servant) 리더십'이지 행동은 ‘군림하는 리더십’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세속 문화에 허겁지겁 따라갈 수밖에 없도록 요구하는 팔로우어(follower)들로 인해, 기도의 세계에 머물기 보다는 현실에 세계에서 자료를 축적하려고만 하는 리더들, 내려놓고 포기하는 리더십보다는 끝까지 고집스럽게 교회의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리더십들을 보노라면 울화통이 터지다 못해 무력해지기까지 한다.

한 번은 교회 연합기구의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새벽부터 크고 작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 거룩한 주제로 토의와 기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주차장에는 화려한 검은색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하고, 그들을 수행하는 이들이 따분한 표정으로 구석구석 앉아 있었다. 그런 리더십들은 과연 높고 화려한 곳에만 머무는지, 도대체 그들과 교제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교회 리더십들은 도통 ‘진솔함’이 없다. ‘고백’이 없고, 거룩한 말씀으로만 자신의 입을 채운다. 그들은 높고 거룩한 성전에 살며, 나는 낮고 허접한 세속에 산다. 그런 리더들과 관계를 유지하기는 어렵고 어색한 일이다. 

내가 진정 당혹스러운 것은 이런 리더십들의 얕고(때론 천박한) 전혀 삶과 동떨어진 신학(혹은 설교) 때문이다. 그들의 말에서 진리와 은혜를 배우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현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숱한 갈등 양상의 뿌리는 ‘권위의 상실’에 있다. 그러나 정당한 권위조차 모조리 위협당하는 이유는, 교회 안과 밖을 막론하고, 권위를 가진 이들의 리더십이 권.위.주.의.에 빠져 전.혀. 모범을 보이지 못한 까닭이다. 고집스럽게 자리에 집착하고, 불법을 행한 과거를 은폐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리더의 역할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갈등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답답하기만 하다. 멀리 한국 교계의 일반적 리더십으로부터 가깝게는 우리 교단과 교회의 리더십에 이르기까지, 나우웬의 발자취와 흡사한 리더십은 도통 보이질 않는다. 나우웬이 현대 지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세 가지 유혹(현실적이 되라, 멋있게 보이라, 힘이 최고다)을 알고 이로부터 과감하게 전향하려는 리더십의 부재는 곧장 하나님의 부재현상으로 이어지는 듯싶다.



세 가지 리더십 훈련

사람은 누구나 리더십의 자리로 요구받는다. 나 역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역자로서 준비단계에 서 있다. 앞선 이들을 내다보면서 배울 건 배우고, 고칠 건 고치면서, 선은 잇고 악은 단절하는 이음 역할을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면 나우웬이 제안하는 리더십의 조건을 갖추기 위한 세 가지 훈련은 어떠한가. 세상의 사랑이 아닌 제1의 사랑 안에 뿌리내리는 묵상기도의 훈련에 충실한가? 신학적 지식을 소유한 것으로 안전함을 누리는 리더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관계 맺는 법을 아는, 기도자의 리더십으로 자라나고 있는가? 이것은 커다란 도전이다.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신학교의 커리큘럼은 ‘지식’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맺기를 위한 실제는 커리큘럼 뒤에 숨겨져 있다. 그것은 각 개인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드러난 커리큘럼과 숨겨진 커리큘럼을 조화롭게 소화해내며 훈련받는 일이 필요하다.

두 번째 훈련으로써, 자기의 연약함을 은폐하거나 영웅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공동체 안에서 ‘고백과 용서’를 구하는 관계 맺음의 훈련은 어떤가? 이 역시 몹시 어색한 훈련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대는 고백을 정죄하는 시대이다. 고백은 잘 해야 동정이고 혹 어설프면 매도당하기 쉽다. 고백하는 이에게 박수는커녕, 연약하다는 낙인만 찍는다. 특히나 기독교 리더들로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본 훼퍼가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밝히듯이 죄를 고백하는 공동체가 얼마나 건강한지는 경험해 본 이들이 잘 알 것이다. 나도 나의 연약함을 누르고 건강한 척, 밝은 척, 아무 문제없는 척 하며 말씀으로 모든 걸 무마하려고 하는 유혹으로부터, 좀 더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공동체 안에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훈련에 충실해야 하리라. 특히 신학교는 공동체 생활을 한다. 하루 24시간을 함께 공부하며 신학훈련에 임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비신학적 욕정으로 유혹을 받는지 모른다. 그러나 고백과 용서는 매우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고 있다.

마지막 훈련은 신학적 성찰에 대한 훈련이다. 이는 목적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유지하는 것인데, 목회를 도구로 삼지 않고, 위로부터의 부르심에 순응하며 인도함을 받는 일과 관련된다. 그러나 역시 성공적인 목회에 대한 수많은 사례들이 순수한 신학생의 마음을 뒤흔든다. 신학적 훈련보다는 목회 성공을 위한 수단에 눈을 돌리려는 유혹이 밤낮으로 우리를 감싼다. 그러다보니 신학적 성찰이라는 것이 성공을 위한 효율적 사고로 둔갑하곤 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성찰한다는 것을 나우웬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일상의 고통과 기쁨의 현실들을 깊이 생각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하나님의 부드러운 인도하심을 아는 데까지 끌어올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천 리더십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도록 사람들을 섬기는 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본인이 먼저 하나님의 인도 하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섬기는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는 심심찮게 듣는다. 그것이 예수님의 리더십이었다는 분석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그런 리더십이 그냥 마음을 먹는다고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실세계에서의 유혹이 매우 크고, 또 우리의 욕망이 이 유혹들을 반기며, 우리의 본성은 매우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훈련이 필요하다. 섬기는 리더십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교회 안팎에서 시행되고 있긴 하지만, 묵상훈련, 고백과 용서, 신학적 성찰을 골고루 훈련프로그램으로 삼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훈련은 세상의 요구들, ‘현실적응’, ‘유명세’, ‘힘’과는 다른 방향이기 때문이다.

자크 엘룰이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에서 그리스도인은 그 자체로 혁명성을 갖는다고 했다. 예수님의 삶이, 복음의 실현이 곧 세상의 방식을 뒤집기 때문이다.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 세상이 기대하는 리더십의 부응조건을 거부하는 방식, 그것이 곧 예수님의 삶이었으며, 헨리 나우웬이 초대하는 리더십의 조건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나우웬의 리더십에 관한 고찰을 담은 이 책의 제목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Jeses』이다. 바로 낮은 데로 임하신 예수님의 이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