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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만난 문장

알리스터 맥그래스, 예수님을 경험하는 영성훈련

과제로 쓴 독후감이다. 서평이 아니다보니 자유롭게 내 경험을 활용하는 글이 되었다. 두고두고 영성훈련의 교재로 삼을 만 하다.  

<개혁주의영성>/ 독후감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예수님을 경험하는 영성훈련』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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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ing Christ

“내가 모든 것을 손실로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위대하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3:8)

2학기 개강 첫 주 새벽 시간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마치 해외를 나간 사람이 시차 적응 때문에 고생하듯, 나는 두 세계의 경계선에서 몸부림쳐야만 했다. 교회에서의 바쁜 여름사역이 끝나자마자 잠시 탈진현상이 왔고, 며칠간 내게 새벽은 없었다. 밀린 잠에 취해 새벽을 포기하는 생활을 며칠 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선지동산에서의 2학기가 시작됐다. 그런데 첫 주부터 쏟아져 나오는 각 과목의 실러버스들은 숨통을 죄듯 했고, 새벽기도회는 마치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하기 전까지 번민하던 것과 다름없었다.

육체, 마음, 감정… ‘나’를 구성하는 모든 주체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의지’만이 미력하나마 그 시간을 버텨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 있던 학우들의 기도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수많은 원우들의 간절한 기도들이 마치 교향악의 합주처럼 내 귀에 들려왔다. 우주의 작곡자요 지휘자이신 예수님의 지휘에 맞춰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음색과 톤과 방식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참하게도 나는 그 연주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지휘자도, 악보도 내겐 보이지 않았고 나는 완전 외딴 섬에서 온 사람처럼 컴컴한 채플실에 고독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원우들은 모두 예수님과 호흡이 착착 맞아 멋들어지게 연주하고 있는데, 내 영혼은 그 연주에서 겉돌고 있었다. 그 때, 예수님을,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예수님의 사랑하심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질투심이 솟았다. 마치 어머니의 특별한 비밀을 나는 모르고 있는데 형만 알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을 때처럼 나는 소외감을 느꼈다.

‘포기’라는 것과 씨름을 해야만 했다. 나는 단 한 문장만 죽어라 외쳤다. “예수님! 나도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강의실에서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예수님을 알고 싶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펼쳐 들 때 예수님을 알고 싶습니다. 기숙사에서 동료원우들과 교제할 때 그 사이에 계신 예수님을 알고 싶습니다. 채플실에서 눈을 감고 당신께 두 손 모아 기도할 때 주 날개 아래 품으시는 당신의 신비를 알고 싶습니다. 이 앎을 모른다면, 이 앎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저는 짐을 싸서 집으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아는 것을 가장 귀중한 소원으로 여기고 있다면, 보여주십시오, 깨닫게 해주십시오, 들려주십시오.” 그러자 메말랐던 내 마음이 서서히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간구하게 되었다. 예수님 사랑하심과 그 안에 거하는 것이 내 존재의 근원임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고 나의 시차 적응은 이로써 해소되었다.

그 시간 이후 강의실, 기숙사, 도서관… 가는 곳마다 나는 ‘현상을 열어 신비를 보여 주소서’하며 기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매일의 삶이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하는 찬양이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이 상태라면 신학교 3년을 거뜬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멀리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자부심이 생기는 듯싶었다. ‘얘들아, 아빠가 신학교에 와서 정말 더 많이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나가고 있단다. 여보, 이제야 조금씩 예수님의 종으로 자라는 것을 느낍니다.’


안다는 것

교육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교수님들을 보며 느낀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교육학을 가르치는 교수라면 응당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스승’이라 불릴 만한 자격과 인격을 갖췄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교실 안뿐 아니라 밖에서도 배울 것이 많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최고의 교육학 전문가들로 알려진 분들의 일상생활에서 나는 전혀 교육적 감화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교육의 대한 ‘앎’과 헛도는 교육적 ‘삶’의 관계는 몹시 나를 괴롭히는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불통의 괴리현상의 원인은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교육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태도에서 원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학생들 다수는 교육학을 지식영역의 하나로 알 뿐, 그러니까 단지 학위를 얻기 위한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학문으로만 알 뿐, 그 지식이 자신의 삶 곳곳으로 파고 들어오도록 그 지식에 마음을 열어놓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교육학 박사가 집에서는 자녀를 비교육적으로 교육할 수 있어도 본인에게는 전혀 그것이 엇박자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더 나쁜 것은 개중에 몇몇은 교육학을 순수 학문적 관심으로조차 추구하지 않고 단지 직업적 벌이의 수단(skill) 정도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시대의 학문적 경향은 대체로 이와 같다 할 수 있다. 교육학이 이러할진대 다른 학문들이 그보다 더 나을 리가 없다. 이 비극적 현상은 근대 합리주의의 영향 때문이다. 주체인 이성이 객체인 학문 대상을 ‘파악, 습득, 지배’하는 것이 곧 진리를 얻는 길이라 여기는 풍토가 현대 학문하는 자들의 태도와 학교의 커리큘럼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지식을 몸과 마음으로 함께 연마하는 것이 공부였는데, 지금 시대의 공부는 지식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 하는 것이 그 척도가 되었다. 최근에는 지식에도 인격적 특성이 있다는 주장들이 드문드문 나오나, 여전히 우리 시대에 ‘안다’는 것의 의미는 이성의 활동으로써 ‘~ 에 관한 정보들을 안다’는 것을 지칭하곤 한다.

더욱 슬픈 일은 ‘신학 한다는 것의 의미’가 이와 같은 현대 학문풍토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데에 있다. 신학적 지식을 많이 습득하는 것, 하나님에 관한 정보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 성경에 관해 많이 안다는 것이 곧 신학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나는 이 현상을 신학교에 와서 더욱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목사훈련생으로 훈련받는 이 선지동산에서의 삶을 가만 되짚어보면, 엄청나게 많은 신학에 관한 객관적 지식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반면, 심령은 더욱 더 곤고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신학적 지식의 양이 많아지고, 신학적 체계가 더욱 정교해지며, 언어를 통해 더 풍부한 신학적 개념들을 설명해 낼 수 있는 능력은 늘어난 반면, 가슴 속의 열정은 조금씩 소멸해 가고, 마음속에서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평가와 비교의식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으며(그래서 더욱 바리새화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낮아지고 헌신하고 섬기는 영적 도전은 제한적이다. 성경에 관한 지식은 풍부해졌으나 말씀 한구절에 머물러 내 영혼의 빈터에 말씀의 씨앗을 심고 그것이 자라나도록 하는 일에는 게으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수학적 시간으로써 지식과 씨름하고 있는 반면, 말씀묵상을 통해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은 도통 경험하지 못한다.


마르틴 부버가 『나와 너』에서 나-너의 인격적 관계보다도 나-그것의 물량적 관계가 가져다주는 비극을 지적했듯이, 현대인들은 더욱 가속화되어가는 물량주의 속에서 소외감을 호소하고 있는데, 이는 진리와 ‘인격적 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학의 영역에서도 신학의 대상이자 주체이신 삼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없이 하는 학문활동은 모든 비극을 더욱 비극이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신학교에서 매 학기 ‘영성’과목을 하나씩 수강할 생각이다. 첫 학기에는 ‘기도의 신학’을 수강했고 그에 따라 기도와 이성적 활동으로서의 공부의 균형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번 학기 ‘개혁주의 영성’ 과목을 수강한 이유도 이와 동일하다.


예수님을 경험하는 영성훈련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예수님을 경험하는 영성훈련』은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고도 분명하게 해 준다. 지성으로만 예수님을 아는 것과 가슴으로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의 극명한 차이를 그는 자신의 경험과 많은 선각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었고, 나 역시 가슴으로 그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가슴으로 예수님을 알게 될 때 인생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 곧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저자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자신의 삶 속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라는 체험은, 그저 이성과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앎이요 기쁨이라는 것을 저자는 경험했다. 그 감동이 벅차서 개념으로 사고하는 데 익숙한 학자인 그가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 아닌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아가는 훈련’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물론 그가 몸소 체험했던 것들이다.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에베소서 3:8)을 그처럼 체험하길 소망하며 나는 이 책을 통해 도전받은 세 가지 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체험하려면 ‘묵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저자는 중세 주트펜의 제라드를 통해 묵상을 배웠다고 했는데, 제라드의 정의에 따르면, “묵상이란 읽었거나 들은 내용을 부지런히 마음속에 곱씹으면서 그 내용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특정 방식으로 자신의 애정을 새로이 뜨겁게 하거나 자신의 이해를 깨우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곱씹고, 그 내용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은 매우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 일과가 ‘일’로 꽉 찬 현대인들에게 짧은 구절(혹은 이야기)의 의미를 깊이 깨닫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묵상은 많은 시간동안 집중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중세의 신학자들에게 엄청난 영성의 보화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세인들은 바쁘지 않았다. 그들은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깊이 묵상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 있었다. 그러기에 중세 신학자들은 현대인들이 누리지 못한 ‘깊이’를 경험할 가능성이 많았다. 그리고 깊이 경험한 만큼 그만큼 깊이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사랑받았으리라.

그에 비하면 오늘 나의 신학훈련은 바쁨 그 자체다. 한 학기 동안 9과목 18학점, 한 주 21시간을 수업 받는다. 게다가 과제를 제출하고 퀴즈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는 주말엔 교회에서 봉사해야 한다. 당장 주어진 것들을 해치우기 바쁘다. 한 구절, 혹은 한 주제를 가지고 하루 종일 묵상하기란 여간해서 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른 것들을 포기하지 않을 바에야 말이다. 하다못해 새벽기도 시간도 아침 수업 때문에 중단해야 하고, 흔히들 하는 큐티는 엄두도 못낸다. 이런 현실 속에서 ‘묵상’ 훈련이 가능할까? 묵상훈련을 포기하더라도 신학수업을 강행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유능하고 신실한 목회자 양성에 적합한 것인가? 묵상훈련을 신학교 커리큘럼에 최우선 과제로 삼을 수 있길 꿈꿔본다.

묵상은 의미를 되새겨 보는 작업이다. 묵상이 없는 지식은 피상적 지식에 불과하다. 당연히 묵상이 없는 말씀읽기는 공허할 뿐이다. 그동안 신학교 수업 과정이 메마르고 공허하게 느껴졌다면 그간에 적립된 지식들이 대개 피상적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성을 통해 이해된 지식들은 살아있는 지식이 아니다. 그것들을 곱씹고 그 지식의 의미를 생각하며 그 지식을 기도의 자리로 끌고 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붙들어 맬 때 비로소 지식은 생명을 얻게 된다. 묵상은 더없이 소중한 훈련이다.


둘째, 묵상과 함께 ‘훈련’도 강조해야 할 부분이다. 맥그래스가 제안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방법들은 단번에 깨우칠 수 있는 비법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생활의 핵심일과가 되어야 한다.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제 2상한의 영역들을 소개하기를, ‘긴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들로써 일상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굳이 그의 견해가 아니더라도 묵상은 당장 시급해 보이지는 않지만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런 것들은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을 통해 습관이 되어야 하고, 습관은 삶의 뼈대가 된다.

역시 영성훈련은 단지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할 과제는 아니다. 신학도에게 반드시 필요한 과제이며 한 학기 수강할 과목도 아니고, 3년 내내 역점을 두고 해야 할 훈련이다. 이 훈련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다면 헬스클럽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훈련받은 사람의 근육이 튼튼해지고 멋있어지는 것처럼 영력도 마찬가지로 튼튼해지고 멋있어질 것이다.


셋째, 예수님을 알아가는 훈련법들은 매우 많다. 예수님은 단지 지성활동을 통해 이성으로만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온몸과 온맘으로 예수님을 알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럴 때에 그의 풍성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맥그래스는 상상으로, 가슴으로, 관계 속에서, 장애물 속에서 등등 여러 방식에서 예수님을 묵상할 것을 권하고 있다. 실은 묵상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인식체계들을 활짝 열어두는 일이다. 인식 주체 외부에 있는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열어둔 인식매개체들을 통해 다각도로 우리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이성으로 진리의 일부를 파악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한 상상은 진리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가슴은 지금 여기 나의 자리와 그분의 자리까지의 거리를 좁혀준다. 그동안 잘 쓰지 않았던 인식의 루트들을 열어 두게 되면 예수님을 온몸과 온맘으로 경험하게 된다. 성경은 입체적으로 살아서 가슴을 치게 되고, 기도는 말씀을 새롭게 열어 보여준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입체적으로 아는 것이 이러할진대 현재 내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협소한가! 기껏해야 예수님에 관한 정보의 나열을 통해 그분을 조각조각 맞추는 데에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맥그래스의 책 목차를 찬찬히 살펴보면 삶의 모든 주제들 속에서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불안과 회의 속에서조차도 묵상의 기회로 삼을 것을 권고한다. 이 제안은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전도서의 권면처럼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무장하게 한다. 내 의식이 깨어 있는 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있음을 기억하고,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의 풍성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시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시시때때로 예수님을 새롭게 알아 가는 신비가 삶의 시간과 공간을 가득 채우길 원한다. 단지 내게 주신 선물들에만 시선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눈이 열리기 원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책은 이 소망으로 가슴 벅차게 만든다. 청명한 가을, 매 신학수업이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즐거움으로 넘치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