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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14] 조급증 치유

신의피리 2024. 4. 14. 20:35

주일이다. 교회에 가야 한다. 주말이라 오전에 버스 운행 시간이 안 맞는다. 걸어서 간다. 1시간 20분 소요 예정이다. 시골길을 걷는다. 2차선 도로엔 보행자 길이 없다. 그래도 안전하다. 주일 오전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차가 거의 없다. 

한경면 두모리 길

 

바람이 분다. 기분이 좋다. 갑자기 중고등부 시절에 불렀던 찬양이 흘러 나온다. 

 

알았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이젠 더 피하지 않으리

주님 앞에 가 나를 맡겼네 진정 기쁜 날였네

삶은 의미 없고 안식 없었네

그러나 이제는 달라 새 삶이 내게 임했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이젠 더 피하지 않으리

그가 내게 와 나를 구했네 진정 기쁜 날였네

 

단조의 찬양이다. 부르면서 새삼 깨닫는다. 가사와 단조가 이렇게 부조화라니. 그런데도 은혜롭다니! 모처럼 교회 가는 길이 기대가 되고 즐거워졌다. 목회자가 되고 나서는 주일 아침에 교회 가는 길이 늘 기대되는 것이 아니었다. 의무였다. 설교라는 부담, 사역이라는 부담을 안고 가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아무 부담 없이, 예배에 대한 기대 하나로 교회를 간다. 가다 보니 찬양도 나온다. "진정 기쁜 날였네"

 

조수교회

 

제주시 한경면 조수리에 있는 조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지난 주 처음 예배를 드렸다. 예배당 입구에 들어갈 때 안내를 하시는 한 권사님께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왜 그러시나 싶어 나도 쳐다보니 '목사님이시죠?' 한다. 어떻게 알았지 싶었다. 그 권사님은 오늘도 한 마디 한다. '오늘은 혼자 오셨네'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낯선 이를 유심히 살피고, 나름대로 환영의 인사를 하는 게다. 교회 정문에서부터 마당을 지나 교회당 입구까지 안내위원들이 연신 낯선 남자를 쳐다본다. 그분들의 시선이 왠지 따뜻하게 느껴진다.

 

예배 후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국수다. 아주 맛있다. 식사를 하고 나니 80대 중후반의 할아버지가 와서 인사를 하신다. 어디에 사는지 묻는다. 한달살이 왔다고 하니,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37년생 은퇴장로님이시다. 이곳 제주 한경 조수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사셨다 한다. 경험담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귀가 쏠린다. 내 아버지와 동갑이라 하니, 1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이렇게 노인이 되었을까 싶기도 하다. 내 기억에 70대 중반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에서 나는 노인을 본 적이 없다. 늘 젊었다. 소화가 되지 않아 병원에 검사하러 가셨다가 말기암 진단을 받고 40일 만에 돌아가셨다. 경황이 없었다. 제대로 된 대화도 못 나눴다. 37년생이라는 말에 잠시 아버지 생각에 빠진다. 

 

장로님이 어린 시절 교회에 다니게 된 이야기, 신앙이 좋았던 어머니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게 된 이야기, 4.3 사건 때 동네 학교 교사들이 단지 교사란 이유로 총살당한 이야기, 옆동네 명월리 양반들과 경쟁하던 이야기, 끝없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산 증인이다. 다행이 나처럼 한달살이 하러 왔다가 2주째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식사하던 분들이 급히 이야기를 끊고 손뼉 치고 일어나는 바람에 나도 함께 일어났다. 더 듣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제주 사투리를 섞어 말씀하시는 노 장로님의 이야기가 선명하게 귀에 들어오지 않아 잘됐다 싶었다. 

 

교회 근처에 '유람위드북스'라는 카페가 있다. 숙소에 비치되어 있는 추천 카페 중에 하나인지라 가봤다. 그 시골마을에 있는 카페에 차들이 즐비하고 손님들로 가득 차 있다. 북카페다. 책이 정말 많다. 좌석도 너무 편안하다. 책을 읽다가 너무 편안해서 잠이 들었다. 

유람위드북스

 

숙소로 걸어갈 힘이 없다. 오후에 지나가는 버스가 있긴 한데,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서둘러 나가서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린다. 너무 일찍 나왔다. 버스가 오려면 한 20분은 기다려야 한다. 마침 아내와 통화하면서 내 성격을 고백한다. 대강 시간 맞춰 버스정류장으로 나가면 될 것을 혹시 놓칠까봐 일찍 나간다는 게 그만 너무 일찍 나가서 정류장에서 2-30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다. 늦는 것보다야 낫지만 너무 일찍 나가서 기다리면서 투덜거리는 것도 참 웃기는 성격이다. 아내와 데이트할 때부터 지금까지 이 성격 때문에 나는 늘 손해 본다. 나는 정해진 시간보다 30분은 일찍 나간다. 아내는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늦게 온다. 아주 조금 늦게 온 것뿐인데 나는 너무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하고 투덜댄다. 

 

버스를 오래 기다려도 시간이 아깝지 않다. 지금 나는 가진 게 시간이다. 해야 할 의무도 없다. 만나야 할 약속도 없다. 귀가 시간도 없다. 조급해 할 게 없다. 불안해할 게 없다. 오롯이 그 순간, 현재에 머물면 된다. 실은 일상에서도 이런 마음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조급함 때문에 화를 자주 내고, 일을 그르칠 때가 많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