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기고/QTzine

설거지 묵상

신의피리 2015. 5. 25. 23:14

QTzine [2005/09] 

김종필 편집장 qtman@young2080.com


 

결혼한 후 아내에게 이런 약속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설거지만큼은 내가 하겠다, 당신을 돕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의 일이기에 하겠다, 라고 말이죠. 그런 정신으로 하다 보니 아내에게서 자동식기세척기란 별칭도 얻었는데, 요샌 좀 녹슬어서 작동이 안될 때도 있지만, 아직 폐기처분할 만큼은 아니랍니다. 여전히 주방은 저희 부부의 좋은 대화 장소로서 손색이 없죠.


제가 설거지에 열심인 이유는 처음엔 밥값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리도 못하면서 차려진 밥을 먹기만 하고 다시 TV로 휙 돌아서는 것만큼 크나큰 죄악(?)은 없단 생각이 있었고, 남녀의 삐뚤어진 역할문화를 나라도 좀 바꿔보리라 하는 다짐도 한 몫 한 것 같습니다. 결혼 전엔 잘 몰랐는데, 결혼하고 보니 정말 우리의 가정문화는 여성에게 너무 가혹한 듯싶었거든요. 그래서 설거지만큼은 정말 남성이 해야 맞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설거지는 참 고된 일입니다. 일을 마치고 행주로 싱크대를 한 번 싹 닦고 나면 허리가 뻐근한 게 예사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수북이 쌓여있던 빈그릇들이 깨끗하게 닦여 정돈되는 순간, 마음은 한결 가벼워집니다. 단지 그릇만 닦았을 뿐인데 마음도 닦인 기분이고, 단지 음식물 찌꺼기만 버렸을 뿐인데 생각의 찌꺼기도 분리수거 된 느낌 때문이죠.


먹다 남은 음식물이 오래돼 냄새나는 것처럼, 마음속의 찌꺼기들을 치우지 않아 퐁퐁이라도 확 짜서 수세미로 벅벅 닦을 수만 있다면 좋겠단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루 이틀 영혼의 양식을 거르거나 대충하게 되면, 틀림없이 우리 영혼엔 이끼가 끼고 냄새가 납니다. 오래되면 그 사실조차 모르게 될 거구요. 내 영혼의 그릇 안에 말씀을 담는 일뿐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설거지하는 일은, 비록 바쁘건 귀찮건 힘들건 지루하건, ‘매일’ 해야 영혼건강에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