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연휴 기간에 읽을 만한 얇은 소설을 찾았다. 아내의 추천으로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소설인줄 알고 읽었는데 소설이기보다는 어린 시절에 대한 여러 편린들을 추적하는 성찰적 글이라 느껴졌다. 그런데 중간 어느 지점에서부터 공명이 일어났다. 저자가 어린 시절, 그 심각한 사건(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던 사건) 이후로, 자신의 가정과 부모 배경이 모두 사립학교에 다니던 저자의 동료, 교사 등의 사람들로부터 경멸의 대상에 속한다는 것을 느낀다. 부모의 처세술, 처세에 근거한 얕은 가정 교육,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말과 행동, 그 이면의 이중성, 기독교 사립학교에서의 의무적 종교교육이 가져다 주는 수치심... 저자는 그 사건이 있었던 열두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싹튼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삶의 방식이었음을 추적한다.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이 부끄러움의 표식으로 변했다. 마당의 오줌통, 함께 자는 방(공간 부족으로 인해 우리 계층이 대개 그렇듯 나는 부모와 같은 방에서 잤다). 어머니의 손찌검과 거친 욕설, 술에 취한 손님들과 외상으로 물건을 사는 친척들, 술에 취한 정도를 정확히 파악할 줄 알고 월말이면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는 우리 삶에 대한 정확한 인식, 오직 이 인식만으로도 내가 사립학교의 무시와 경멸의 대상인 계층에 속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6월 일요일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125p)
지금은 까맣게 잊었던 감정이 떠올랐다. 내 가정 배경의 미천함(?)이 심히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몰랐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부모님은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어머니는 못 배운 게 한이 되었다. 반면에 자녀들 교육엔 최선을 다하셨다. 아버지는 40대 이후로 아무 일도 안하셨다. 집에만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대화 꺼리가 없었다. 어린 시절 언젠가 아버지가 내게 '어이그 촌놈'이라고 한 말이 오래 내 기억에 저장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밖에서 내 아버지가 촌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다. 내 아버지가 좀 배운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책을 읽으시고 정치와 세상에 대해 아들과 대화를 할 줄 아는 분이였다면 어땠을까. 부모님은 촌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보수적 신앙심이 깊었으나 어머니와 함께 뭐라도 사러 상점에 가면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제 가격을 주고 편히 나온 날이 없었다. 흥정끝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어머니는 자신이 주고 싶은 돈만 툭 던지고 주인의 투덜거림을 듣지도 않고 그냥 나오시기 일쑤였다.
나는 경기도 한 작은 마을에 살면서 서울로 학교를 다녔다. 점심시간에 내놓는 도시락 반찬이 종종 창피하게 느껴졌다. 서울 사는 친구들의 도시락 반찬과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입는 옷, 내가 메는 가방, 모든 게 촌스럽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부끄러움은 존재의 큰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부끄럽지 않다. 나는 이 부끄러움을 평생 속으로만 간직하지 않았다. 목회자로서 설교 시간에 종종 내 부끄러운 과거를 숨김없이 정직하게 성찰하며 이야기해왔다. 어느 기간을 지나면서 더이상 숨길 이유도 없었고 숨겨야 한다는 강박도 사라졌다. 지금은 부끄럽지 않다.
책을 읽고 난 후, 아내와 딸과 함께 부끄러움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20대 중반이 된 딸은 부모와 가정 배경이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나와 아내는 나름 많이 공부했고, 자녀들에게 도덕적 신앙적 교육을 강압적으로 하지 않았다. 조금 가난한 축에 속했지만, 나날이 삶은 나아졌고, 자녀들도 우리 가정의 경제적 수준을 잘 이해하고 있다. 목회자의 자녀임도 잊지 않는다. '부끄러움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이 문장으로 군대에 가 있는 아들과도 한번 이야기 해보고 싶다. 아주 작은 감정이라도 그것이 삶과 정신에 배이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