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렉시오 디비나

마태복음 27:1-10 / 유다의 비극

신의피리 2024. 4. 22. 07:55
마태복음 27:1-10

1 새벽이 되어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모두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2 그들은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3 그때에, 예수를 넘겨준 유다는, 그가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쳐, 그 은돈 서른 닢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고, 4 말하였다.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아넘김으로 죄를 지었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요? 그대의 문제요" 하고 말하였다.
5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6 대제사장들은 그 은돈을 거두고 말하였다. "이것은 피 값이니, 성전 금고에 넣으면 안 되오." 7 그들은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들의 묘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8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밭이라고 한다. 9 그래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들이 은돈 서른 닢,
곧 이스라엘 자손이 값을 매긴 사람의 몸값을 받아서,
10 그것을 주고 토기장이의 밭을 샀으니,
주님께서 내게 지시하신 그대로다."

 

"그가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쳐"

 

유다는 후회했다.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 자신의 결정과 행동이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유다는 예수께서 사형선고받으실 것을 몰랐던 것일까? 대제사장들이 스승에게 겁을 줘서 마음을 고쳐먹게 하기를 바랐던 것일까? 아니면 스승이 잡히면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자 좌절한 것일까? 아니면 스승에 대한 연민이 커져서 후회하게 된 것일까?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 잠시 스승에게 실망하고 분노하여 자신도 모르는 배반행위를 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일까? 성경은 유다가 '뉘우쳤다'고만 말하지,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받은 은돈 서른 닢을 도로 가져간다.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아넘김으로 죄를 지었소"

 

유다는 예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그가 성격 모질고 야망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죄가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유다는 사형 판결을 되돌리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이 가능하다고 여겼을 것일까. 그는 지난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끝까지 양심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끝까지 돈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거짓과 악의 모의에 가담한 것을 후회하고 마지막까지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유다의 제안은 거절당했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선생을 배반했으니, 그리고 선생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유다는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더 살 의미가 사라졌다.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은 욕되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을까. 자신이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이 누군가에게 모욕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용서하다고 생각했을까. 그가 베드로처럼 그냥 밖에 나가 통곡하는 것에서 멈출 수는 없었을까. 예수께서 그가 목을 매달 때 나타나셔서 그만하면 됐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었을까. 마귀가 유다를 참소한 끝에 유다는 그 목소리에 영혼을 빼앗겼던 것일까. 그는 죽은 후 정녕 지옥에 갔단 말인가. 자신이 배반하여 십자가 죽음으로 스승을 몰아갔지만 결국 스승은 3일 후 부활하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세상을 뒤집어엎는 혁명을 시작하지 않으셨던가. 그 승리의 행진에 유다는 끝까지 참여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 그는 죽음 이후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없었을까. 그가 스승을 돈 받고 팔아 배신한 것은 몹쓸 짓이지만, 그가 후회하여 돈을 되돌려 주고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목 매어 죽은 것은 불쌍하지 않은가. 긍휼의 심장과 피를 가지신 주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까. 

 

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보고 듣는다. 그들을 정죄하기 어렵다. 스스로 목숨을 버린 사람들은 대체로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깨끗하고 정의롭게 살고, 순수하게 자신을 던져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그 선의가 배반당하고, 자신들의 살아 있는 그 삶이 모욕과 수치라 여길 때 그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은 죽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죽는 고통이 살아 있는 고통보다 더 낫다고 여겼으리라. 아니면 양심이 깨어 있고 선해서 자신이 실제 지은 잘못 보다 더 큰 벌을,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주는 벌보다 더 큰 벌을 주어야 한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파렴치한 죄를 짓고 뒤늦게 발각되어 죽은 이들, 그리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이들, 살 소망을 잃고 좌절 끝에 내면의 더 나쁜 목소리에 잠식되어 목숨을 잃은 이들, 그리고 스승을 배반한 것을 후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다, 나는 이들의 결정이 마음 아프다.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 나도 그들에게 돌멩이 하나 더 던진 것 같아 괴롭다. 유다에게 욕을 하지 말아야겠다. 

 

주님, 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건만, 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건만, 너무 생각 없이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해 왔습니다. 부디 주님의 측정 불가능한 그 긍휼과 사랑을 의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