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렉시오 디비나

[마태복음 26:69-75] 몹시 울었다

신의피리 2024. 4. 20. 06:00
마태복음 26:69-75

69 베드로가 안뜰 바깥쪽에 앉아 있었는데, 한 하녀가 그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네요."
70 베드로는 여러 사람 앞에서 부인하였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71 그리고서 베드로가 대문 있는 데로 나갔을 때에, 다른 하녀가 그를 보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72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하고 다시 부인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73 조금 뒤에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요. 당신의 말씨를 보니, 당신이 누군지 분명히 드러나오."
74 그때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말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75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바깥으로 나가서 몹시 울었다.

 

한 번 베드로의 입장이 되어 본다. 눈을 감고 상상력을 발휘한다. 나는 베드로다.

 

도망갈 수 없다. 내가 오늘 저녁 식사 시간에 뭐라고 했던가. 절대로 절대로 선생님을 버리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그 사람 유다가 우릴 배신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놈들이 우리 주님을 끌고 가셨다. 아까 주님께서 내가 휘두른 칼을 가져가셔서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나를 보호할 무기가 없다. 그렇지만 여기서 도망갈 수는 없다. 가보자. 일단 가보자. 일단 따라가 보자. 

 

(머리를 뒤집어쓰고, 최대한 얼굴을 가린다. 무리들을 좇아온 사람들 뒤꽁무니에 따라붙는다.)

 

여기가 대제사장의 집이구나. 아니 저 놈들이 우리 선생님에게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도대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아니 주님, 왜 그렇게 맞고만 계십니까?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보이십니까?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것입니까? 이러려고 우리가 지난 3년을 다닌 게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 그 무섭던 갈릴리 바람을 잠잠케 하셨던 능력을 발휘 좀 해보세요. 당신은 우리가 기다렸던, 모세가 말했던 그 선지자 아니었습니까? 우리를 로마 압제해서 해방시키시고,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새롭게 하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도대체 왜 그렇게 무기력하기만 하십니까?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과 함께 다닌 사람이네요!"

 

순간, 아주 찰나의 순간 나는 수십 번, 수백 번, 아니 수천번도 더 갈등했다. 그렇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라고 말해야 한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런데, 내 마음의 소리와 달리 내 입에서는 전혀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꿈일 거야. 지금 이건 꿈일 거야. 나는 내가 아니야. 이런 말을 하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두 번째 기회다. 또다시 기로에 선다. 내 마음에서 생각으로, 생각에서 입으로 언어가 튀어 나오는 시간이 이렇게도 길 수가 있는가. 나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다. 그러자 내 입에서 내가 책임지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온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그렇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 아니 안다. 아니 내가 아는 것은 어쩌면 피상적일 수 있다. 그분의 진짜 정체, 그분의 진짜 의도, 그분의 진짜 계획은 나는 모른다. 나는 스스로 합리화한다. 나를 변호하고 옹호하는 말이건만, 스스로 나는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진짜 예수를 모른다. 나는 모른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요. 당신의 말씨를 보니, 당신이 누군지 드러나오."

 

그래, 나는 갈릴리 사람이다. 나는 갈릴리 방언을 한다. 예수님도 갈릴리 방언을 쓰신다. 우리는 동향인이다. 빼박이다. 내가 그와 같은 편이 아니란 걸 증명해 내야 한다. 방법이 없다. 방법이 없다. 할 말이 없다. 그러자 내 입에서 또다시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온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이 말 앞에 뭐라고 한 마디 덧붙였다. 그를 저주한 말인지, 나를 저주한 말인지, 세상을 저주한 말인지, 하나님을 저주한 말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음에도 없는 그 연극적 쏟아냄이 나를 위기에서 모면해 줄 거라 본능이 설득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저주의 말을 절대로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망각했으니까. 아니 실은 나는 저주하지 않은 것이다. 저주했지만 그건 저주가 아니다. 내가 한 저주가 아니다. 나는 그저 진정으로 예수를 모르기에, 모른다고 했을 뿐이다. 나는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을 했을 뿐이다. 

 

(그 순간 닭이 세 번 운다. 그 소리는 청천벽력같이 번개가 내 정수리를 때린 것 같았다. 어젯밤 식사 시간에 주님께서 내게 한 그 말이 또렷이 떠올랐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아아아, 아아악, 꿈일 거야. 이 모든 게 꿈일 거야. 나는 인간도 아니야. 나는 사람도 아니야. 나는 사람새끼도 아니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비루하고 비겁한 거야. 아아아, 아아악. 아아아악. 차라리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차라리 갈릴리에서 그분을 따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주님, 어떻게 되신 겁니까? 나는 어찌 살란 말입니까? 이제 마귀들이 빽빽하게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나는 무슨 소망으로 살란 말입니까? 이런 거대한 암흑 속에서 나는... 나 같은 미물은... 도대체 무슨 존재란 말입니까? 아까 내가 동산에서 잠에 취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주님을 지켜줬을 텐데.... 내가 당당하게 당신의 제자라고 말하고 주님 대신 내가 잡혀갔었어야 했는데... 아아아, 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주님, 누군가 내게 당신의 사람이라 묻거든 숨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사람인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보여주게 하소서. 

칼 하인리히 블로흐, 1873